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아홉 번째 업무일지
강약약강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배우던 그것이 아닙니다.
회사생활을 하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아실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는 줄임말입니다.
조직개편으로 기존팀이 없어지고 다른 팀에 흡수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상품기획과 마케팅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제품 소개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신제품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일을 파트 리더와 함께 의논하며 방향성을 잡아가게 됩니다.
새로 온 사람이 그 업무를 새롭게 진행하면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고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알아서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도움이 되어야 하죠. 그런데 그렇다고 일부러 무시하거나 기를 죽이고 하는 것은 리더가 보일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수죠. 그런데 이 파트리더는 대놓고 텃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고작 파트원 세명을 데리고 들어간 회의실에서 회의 장표를 띄워놓고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 (똥배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내밀고 장표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부터 지적할 때는 참 x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서를 만들고 해당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하여 공유하면 교육효과가 더 좋을 거라고 윗선에 업무 보고한 건 그 리더였지만, 실질적으로 보고서 만들고, PPT로 작성하고, 영상을 한글과 영문 두 개로 만들기 위해 스크립트 작성하고, 스크립트 영문화 작업을 위해 오디오 업체와 녹음하는 등의 일은 다 제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영상 편집 작업 같은 경우에는 외주업체를 활용해 만들어야 정상인데, 비용을 아끼겠다고 상사에게 보고를 했기 때문에 편집 작업까지 파트 내부원이 하게 됩니다. 그는 업무를 진두지휘 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파트원 입장에서는 뺑이는 내가 치고 광은 그가 파는 상황이죠. 이 일을 다 해냈습니다. 주말마다 경쟁사 매장에서 신제품 나오는지 확인하고, 매장에서 제품을 써보고 주말에 바로 보고서 만들어서 파트리더가 제일 먼저 보고할 수 있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 그냥 일 안 하고 과한 상사에 안 맞춰줘야지... '라며 제가 잘못한 거라고 말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할 때,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무언의 분위기가 형성될 때 그 상사의 압박을 무시하는 것은 어느 정도 연륜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빠르게 인정받아야 하고, 그 인정을 받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다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어리고 착해서 그렇게 맞춰주고 일을 잘하다 보면 상사에게 인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 딴에 노력해서 상사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줘도 그는 그걸 취하고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상사는 바로 강약약강(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지금 돌이켜 보니 제가 왜 온 신경을 그 상사에게 쏟고 일을 다하고도 늘 압박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면 그런 태도로 자신의 부하직원을 대하면 저도 똑같이 그를 존중하지 않고 강하게 나가거나 혹은 뺀질거리면 일을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순수하고 착한 영혼을 이용하고 괴롭히는 그가 참 부족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독자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압박이 이어질 때는 세 번 참으라고 딱 세 번만. 그 정도는 자신이 혹시 잘 못하고 있는지 개선할 것이 없는지 충분히 생각하고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고 상사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을 이용하고 배려 없는 태도가 계속된다면 더 이상 참지 말고 조직 이동이나 이직을 생각해보길 권합니다.
저는 그 상사로 인해 신체적으로 약해지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크게 핍박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주말에도 계속되는 그의 업무 지시와 폭언에 (자신이 하는 말이 폭언인 줄도 몰랐을 테니 상식적으로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상사인 팀장과 면담을 하게 됩니다. 상사와 면담 시에는 힘든 상황에 대해 일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일적으로 너무 좋고 잘하고 싶다고. 그리고 이 일을 맡겨주심에 감사하고 책임감 있게 업무 진행하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적으로 상사의 힘든 부분 때문에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휴직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팀장에게 돌아온 답은 다음 프로젝트 끝나고 그때 휴가를 써서 약 2주 정도 쉬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장 죽을 것 같은데 다음 프로젝트가 시기상 중요하니 그걸 먼저 마치고 쉬라는 것입니다. 저는 실감했습니다. 이곳은 사람보다는 성과가 중요한 회사라는 것을. 그리고 이곳에서 나를 지킬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 내 사정을 고려해줄 상사는 이곳에 없다는 것. 조직 이동을 하고 정말 '정글에 홀로 남겨진 심바'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구제불능의 파트장을 6개월간 경험하고 팀장과의 면담에서도 큰 실망을 하고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 이동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다행히 바로 타 조직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동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이때를 생각해보면 다시 한번 배려 없고 멍청한 못난 사람한테 순순히 굴복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충분히 제 능력 발휘를 잘할 수 있는데 그런 상사의 태도에 저를 스스로 병들게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포기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힘들어 노력했던 6개월을 회복하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진짜 누가 뭐라래도 자책하지 않고 나를 지켜주고 응원해줘야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너무 아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