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열 번째 업무일지
해외 주재원으로 있다가 한국으로 귀임한 책임님은 제가 편했나 봅니다. 출장 때 저를 세 번이나 보았고, 그의 온갖 심부름 요청으로 한국에서 필요한 것을 해외로 조달했던 노고로 그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대접도 받았으니까요. 한국으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 팀에 합류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분께 주말에 전화가 왔습니다. 일요일이었습니다. 전화기에 그분의 발신번호가 떴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일요이니까요. 다음 주에 출근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전화하셨더라고요~" 한국에 와서 기쁜 마음에 전화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같은 팀에 복귀한 그분은 업무 적응기간이라 여유가 아직 있으셨는지 종종 팀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듯했습니다. 하루는 저를 불러 커피 한잔을 하자고 하시기에 따라갔더랬습니다. 오픈된 카페가 아니라, 회의실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길래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냥 따라 들어갔습니다.
회의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오랜만에 오신 만큼 기분이 좋고 설레기까지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저에게 몇 살쯤 되냐고 물으시길래 "그런 걸 왜 물으실까요?" 반문했습니다. 그러더니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있느냐 물었습니다. 이쯤 되니 살짝 '내가 왜 회의실에 갇혀서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 거 물어보시려면 괜찮은 남자 소개나 시켜주고 물어보시라며 빙그레 썅년 모드를 장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뿔싸.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에 얼토당토않은 일 같지도 않은 일들을 시켜서 짜증 나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나눌 기회마저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방심한 제가 바보였던 거죠. 책임님은 칠판에 강의하듯 결혼생활의 장점에 대해 나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쯤 되니 저는 공개적인 장소도 아니고 회의실이겠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마음을 먹고 웃으며 제대로 빙썅 모드로 대응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책임님, 여자가 이 남자만 득실 한 회사에서 얼마나 고독하고 힘겹게 사회생활하고 있는지 아세요? 남자 상사들 타입별로 이미 겪을 만큼 겪었고, 그들이 여자 직원을 동료가 아닌 유리천장을 만드는 거 상상은 해보셨나요? 십 년째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여자 후배에게 결혼 적령기 놓치지 않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고 따뜻한 조언을 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진실로 후배가 조직에서 커리어를 쌓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조언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오죽하면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까요? 저 영업사원일 때는 여자는 임신하면 회사 관둬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죠. 지금은 그래도 여성분들 육아휴직도 쓸 수 있고, 많이 배려받으면서 일하고 있네요. 하지만, 또 돌아보세요. 이 많은 팀 중에 여자 팀장 있나요? 제가 십 년 넘게 회사 생활하면서 여자 팀장 밑에서 일해본적 없어요. 그리고, 사실 주변에 온갖 다양한 스타일의 남자 동료들 보면서 남자에 대한 기대나 환상 같은 것도 많이 사라졌어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진짜 여자 후배 걱정하신다면 <82년생 김지영>이란 책 한 번 보고 또 한 번 저랑 이런 이야기 나눠보시죠"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전까지 책임님은 저의 모습을 잘 모르셨던 모양입니다. 해외 출장 동안 본 제 모습은 제100프로가 아니니까요. 이런 내용을 아주 공손한 말투로 미소를 섞어가며 차분하게 말씀드리고 나니 책임님은 멋쩍게 웃으시며 " '아는언니' 선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르네~"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요, 저 이 회사에 신입 공채로 입사해서 10년 넘게 보낸 여자예요~" 하며 따뜻한 웃음을 보여드렸습니다.
다음날 점심시간이었습니다. 구내식당에서 여러 명 모여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또 공교롭게도 이 책임님 앞에 앉아 식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무 일을 보는 여직원에게 말했습니다. "xx야, 우리 팀 도서지원비 있지? 그거로 우리 책임님께 소설 <82년생 김지영> 하나 사드려~"라고 말했습니다. 책임님은 "아니야, 나 그거 필요 없어. 어제 인터넷으로 서평 다 봤어. 음... 안 읽어도 되겠더라"라고 말하고 그 옆의 공대생 출신 남자 책임은 말했습니다. " 아, 82년생 김지영? 그거 페미니즘 책이잖아요." 한순간의 논쟁의 가치도 없게 만들어버린 그 책의 값어치는 한 단어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일하고 있구나.' 한숨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또 떠들면, '저러니까 시집도 못 가고 저러고 있구나... 독한 것...'이라는 소리밖에 더 들을까 싶어 그냥 넘겼습니다.
사회 교육을 많이 받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여자 사원의 비중은 전보다 훨씬 늘었습니다. 수치까지는 모르겠지만 체감상 그러합니다. 하지만 둘러보면 조직책임자가 여자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 조직책임자가 제 목소리를 내고 롤모델이 되어주는 경우는 더더욱 쉽게 찾기 힘듭니다. 남자분들이 "테스 형"을 찾으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회사생활을 할 때, 여성들은 누구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응원받으며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요. 다시 꺼내어봐도 헛헛한 에피소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