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만큼 뭔가를 배우거나 깨닫기 좋은 짝이 있을까?
즐겨보던 티비 프로그램 중에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가 있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게스트를 초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며 편하게 게스트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인데, 유명한 사람부터 일반인들까지 다양하게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편과 함께 즐겨 봤는데 하루는 남편이 자신은 게스트들이 이야기를 할 때 누구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지를 관심 있게 본다는 것이었다. 유재석은 워낙에 국민 MC고, 인지도도 높고, 이야기도 잘 이끌어내니 게스트들의 시선이 유재석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게스트들은 조세호를 거의 등지고 앉아 유재석만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그중엔 조세호에게 자신의 시선을 균등하게 나누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고, 남편은 그런 사람들이 다르게 보인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 당시엔 그 얘기를 흘려들었는데 이번에 내가 조세호의 입장이 될 일이 생기고 나서는 남편의 그 이야기가 번뜩 생각이 났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
이번주 프로젝트 미팅이 있어서 타주를 다녀오게 되었다. 프로젝트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모이는 것이 어려워서 6개월에 한 번씩 한 곳에 모여서 미팅을 하는데, 백 명은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나와 줌으로 자주 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서로 만나면 간단한 소개를 주고받았다.
내가 느끼는 미국은 스몰톡과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대화를 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아무래도 취약한 외국인들은 뒤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고, 농담을 자유롭게 하며 청중을 휘어잡는 몇 명의 미국인들은 아무래도 눈의 띄고 그들 주변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린다.
이번미팅은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미팅이 끝나고 저녁엔 함께 식사를 했다. 어쩌다 보니 자리를 잡고 앉은 곳에는 대부분이 이번 미팅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고, 한 명은 얼마 전부터 미팅을 함께 해서 얼굴은 아는 A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적인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생각에 A와 대화를 하면 되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A는 조용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청중을 휘어잡는 입담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옆에 A와 버금가는 입담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둘은 신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내가 이야기를 할 일은 줄어드니 부담은 적어지지만, 그 청중을 휘어잡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말이 없는 사람이 소외되거나 대화에 함께 참여하거나 하게 되는데, A는 전자에 해당되었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 조세호를 등지던 게스트들처럼 A는 점점 나를 등지고 앉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정신노동이 되기 시작했다.
예전엔 이런 자리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엔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왜 나는 저만큼 말을 못 하는 것인가를 자책하며 다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이번에도 이전과 다르지 않게 지쳤고 기운 없는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오며 마찬가지의 자책을 했다. 순간 남편과 했던 조세호에게 등지던 게스트이야기가 생각이 났고, 여태껏 나에게 등지지 않고 대화에 참여하게 도와주던 여러 명 들이 떠올랐다.
다음날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혼자 걸어가는 한 명이 보였다. A가 옆에 있었지만 A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바빴고 혼자 걸어가는 한 명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얘기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걸음을 빨리해 그 사람 옆으로 가 말을 걸었다.
나도 소외된 사람이 보이면 A처럼 모른척한 적도 사실 많았다. 귀찮기도 했고, 나 말고 누군가 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재밌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이 일단은 더 좋았다. 그리고 한국에선 어느 곳에 가서 끼지 못하면 어쩌지란 고민을 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주변을 둘러보기보단 웃고 떠드느라 바빴다. 아마 A도 그랬을 것이라 A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예전의 내 모습이 보였다.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 공자
이번기회를 통해 나도 배웠으면 한다. 남편이 말할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엔 저런 자리가 생기면 (좀 더 내가 잘 보였으면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대화를 할 때 균등하게 사람을 봐야겠구나라는 생각만 했지 일상생활에서 할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저런 자리가 생길 때만 신경 쓴다고 그 순간 내가 안 하던 행동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사람을 균등하게 바라본다는 사소한 행동 하나 가 받는 사람입장에선 매우 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 그 사람이 보이기도 하고, 불편했던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겪어봐야지만 알게 되는 것이 아쉽지만 경험만큼 뭔가를 배우거나 깨닫기 좋은 짝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