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야날자 May 18. 2024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여행

설렘과 흥분, 그리고 편안함

11년 전 처음 미국에 있는 남자 친구(현 남편)를 만나고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편은 유학 1년 차 중이었고, 우리는 그다음 해에 결혼을 하고 나도 남편이 다니는 학교에 원서를 넣고 같이 유학생활을 시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이 유학을 간 학교는 도시가 아닌 작은 시골마을에 위치해 있었고, 난 그 동네가 얼마나 시골인지 학교분위기는 어떤지 등을 확인하고자 미국으로 향했다.


나에게 미국은 사실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오는 곳이었지, 내가 살게 될 나라가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 나는 영어 울렁증이 대단했다. 어릴 때부터 수학 쪽으로는 타고났지만, 언어 쪽은 완전 잼뱅이였다. 영어를 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고, 어떻게든 피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 초반부터 남편은 자신은 유학을 갈 것인데 같이 가자고 나를 꼬셔왔고, 그 꼬임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저 꼬임에 넘어가는데 한몫한 것은 어린 시절 내가 했던 말도 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종종 물어봤었고, 나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똑똑한 사람이 좋아 보였는지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엄마에게 똑똑한 사람은 누구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박사'라고 말했다. 그 뒤로 나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박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박사였다는 걸 다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자 나를 꼬셨던 것이다. 그때 불현듯 어릴 때 내가 했던 저 말이 떠올랐고, 나는 박사가 되고 싶단 생각에 그렇게 싫어하던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했던 영어공부는 입학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점수를 따기 위한 시험 위주의 공부였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하고부터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왔다는 것에 설레고 흥분이 되기도 했지만 긴장감이 더 컸었다.


입국심사는 물어보는 것이 정해져 있으니 별문제 없이 통과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손짓발짓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말은 뱉으면 되는 것이니 내 맘대로 뱉었지만, 알아듣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가 여태껏 공부했던 것이 영어가 맞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공항까지 오는 버스가 일찍 없었던 남편은 내가 공항에 도착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타났고, 남편을 만나고 나서야 긴장감을 좀 풀 수 있었다.


처음 갔던 미국은 사실 참 신났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신기했다. 미국을 가기 전까진 한국에서 5시간 안에 갈 수 있는 나라들만 가봤기 때문에, 아시아인이 아닌 다른 인종으로 둘러싸인 상황에 놓인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그 당시 남편이 다니던 학교도 내가 생각하던 시골보다는 훨씬 더 번화해서, 이 정도면 살만하겠네라고 생각했었고 무엇보다 뉴욕과 보스턴이 몇 시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여행과 사전답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유학을 가는 것만 남았구나 생각하며 기뻐했었다. (이후 유학생활은 이렇게 희망과 기쁨만 있지는 않았지만..)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했을 땐 설레고 흥분이라는 마음보단 집에 왔다는 편안함을 느끼며 여행으로 고단해진 몸을 끌고 엄마, 아빠가 있는 우리 집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지 벌써 11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반대로 한국을 들어가는 일정을 잡으면 언제나 흥분되고 설렌다. 비행기표를 살 때까지만 해도 크게 와닿지 않지만, 한국으로 가는 일정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분주해진다. 한국 가서 꼭 하고 오고 싶었던 것들을 빼먹지 않고 하고 오기 위해 예약해야 하는 곳들은 미리부터 예약을 하고, 보고 싶었던 친구들에게 한국방문일정을 알린다.


올해는 특히 아빠 칠순이 있어서 내가 한국에 들어가는 일정에 맞춰서 가족들과 좀 길게 여행을 가기로 했다. 세 자매가 있던 다섯 식구에서 이젠 모두 결혼하고 애도 한두 명씩 있어서 10명이 넘는 인원이 되어버려 일정 잡는 일은 물론이고 장소 정하기도 보통이 아닌 일이 되어버렸지만, 며칠간 바쁘게 카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숙소와 비행기표구매를 완료하고는 서로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부모님 10 계명을 출력해 가야 한다며 막내가 보낸 10 계명을 보며 서로 웃었고, 나는 언쟁/싸움금지이니 싸우게 되면 벌금이나 벌칙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예전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나로 인해 나와 동생은 크게 싸웠던 것이 생각이 났고 제 발이 저려 이런 말을 먼저 하게 되었다.) 이제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손자, 손녀, 처제, 형부, 제부, 사촌, 처형 등등 너무 많은 관계가 존재하기에 조심할 일이 더 많아졌다.




미국과 한국은 너무 멀다. 장거리 비행은 해가 갈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게 느껴지고, 한국과 미국은 정반대의 시간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시차적응 또한 쉽지 않다. 처음 미국을 가던 날, 그리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 설렘과 흥분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이제 집이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던 느낌도.. 이제는 정반대의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집에 왔다'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다!' 하며 설레고 흥분이 된다. "와! 내 나와바리다!! 내 가족이 다 있는 곳이다" 라며 심장이 약간은 흥분한 박자로 쿵쿵 뛴다.


사진: UnsplashPascal Meier



이전 05화 아들의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