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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 May 04. 2024

애매하게 해방이다

완벽남은 개나 주고, 무한 굴레의 우울에 빠지기

나름 평범했다.

그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며 사는 삶. 나쁘지 않은 걸 넘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인기도 많은 애가 나를 왜 만나주나 싶어서 너무 어색하게 지내던 첫날이 지나고부터는 매우 만족스러운 연애를 했다. 그 나이에 연애하면 얼마나 풋풋하고 행복할지 싶지만, 우리는 달랐다.


처음에는 다른지 잘 몰랐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빠른 것 같다 정도? 사실 서로 못 만나는 날이었던 만우절과 그다음 날이 지나고 우리는 첫 데이트를 했고, 어색해 죽을 것 같아 마구 돌아다니는 나를 계속 쫓아와서는 내 눈을 마주치는 그가 너무 귀엽고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적응돼서 내 어릴 때 이야기를 했는데 흥미롭게 들어주는 탓에 조금 신난 채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를 '자기'라고 칭했다. 바로 전 날부터 그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벌써 습관이 들었던 모양이다.


근데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게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추진력이 좋은 편인데, 내가 자기라고 부르자 고장 나던 그가 내놓은 방안이 '실제로 보고 그런 말 하면 안아 버린다'였다. 사실 협박 느낌으로 들리긴 했지만 그와의 포옹은 어떨지 궁금해서 그러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연스럽게 나온 '자기' 한 마디를 듣고 그가 그렇게 바로 안을 줄은 몰랐다.


우리의 첫 포옹은 풋풋하고 짜릿했다. 신나서 이야기하던 내 입이 멈췄고, 옆에 앉아 있었어서 조금 불편한 자세이기도 했고, 서로 안지 못하고 어깨만 잔뜩 움츠린 나와 내 한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그. 정말 풋풋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뇌가 멈춘 상태로 가만히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풀더니 "잠깐만. 나 지금 너 안은 거야?"라고 말하며 얼굴을 가리고는 부끄러워했다. 은근 생각 많이 하고 한 줄 알았더니 본인도 본능적으로 나온 거라 한 지도 몰랐나 보다.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진 못했지만 가기 전에 "잠깐만." 하더니 내 손목을 끌어서 한 십여 초 안고는 나의 다급함(비밀 연애라 들킬 수도 있었고, 주변에 사람이 꽤 많았으며 둘 다 집에 급하게 가야 하는 시간대였기 때문에)에 손을 풀고 그 손을 나에게 아쉽도록 흔들었다.


놀랍게도 그 나이에 겪은 높은 수위의 경험을 꽤 많이 했던 나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됐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그 행동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자면 나도 내가 첫사랑과 키스를 할 줄은 몰랐다. 사실 내가 하는 게 키스가 맞나 싶기도 했는데 내가 더 잘했던 것 같다. 그 나이에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사실 몇 년 채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때의 난 정말 미친 것 같다. 만난 지 50일도 안 된 남자랑 집에서 영화 보다가 키스라니. 웩. 낭만도 이런 낭만이 따로 없을 거다.


그 이상의 수위는 말하기도 싫다. 그와 있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는 것 자체도 꽤 고통스럽고 오글거리기도 한다. 좀 후기로 와서 말해 보자면, 우리는 150일 즈음되던 날부터 매일을 싸웠다. 내가 그와 헤어졌던 건 170일 즈음이었으니 거의 한 달을 싸웠던 것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나와 같은 반이었던 좀 예쁜 여자애였다. 질투가 많은 편이 아니었던 나도 꽤 많이 질투하게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내로남불을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그때까진 내가 좀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내 잘못을 반성하게 된 기회가 많아서 내 단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솔직히 지금은 기억도 안 나서 다시 완벽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당시 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서 그냥 툭하면 죽을 것 같은 그 상황에 그의 밑바닥을 전부 발견했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자 하나에만 미쳐서 내가 손해 보는지도 모르고 살던 내가 갑자기 나에게는 통제하는 행동을 본인이 하고 다닌다거나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고 갑자기 그의 세상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행동은 스킨십이다. 내가 그에게 하는 스킨십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는 스킨십 말이다. 그는 그것을 통제했다. 당연히 나는 남자는 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통제를 했냐 묻는다면 여자한테도 질투를 느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거다. 평소 밝고 활발한 성격이던 나는 우리 반 여자애들과 춤을 많이 췄었는데 거의 유일한 행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말발로 이겨먹겠단 생각이 쫙쫙 보이는 말투로 나를 격하게 통제해서 나는 결국 그를 피하거나, 친구들과 놀지 않고 혼자 엎드려 운다거나 하는 행동만 반복하며 그에게 사과를 거듭했을 뿐 더 이상 우리 관계에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나의 갑을관계가 시작되었다.


나는 매일을 사과로만 채우며 보내기 시작했다. 매일을 사과와 함께 보낸 하루들은 그를 더 신나게 만들었고 죽음과 같았다. 분명 그 나이대의 내가 판단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겠지만, 분명히 그의 잘못인 하루들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계속적으로 사과만 하고 사는지 이해가 안 되고 사랑이 이렇게 아픈 건지도 모르겠고 예전과 달라진 그의 모습에도 사람들은 그가 아직 완벽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던 외로운 인생이 너무 싫었다. 그땐 몰랐다. 그런 일들이 가스라이팅일 줄은. 갑을관계일 줄은. 내가 하고 있던 연애가 편한 연애가 아니었을 줄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굳이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매일을 이성적이지 못하게 살았다. 나는 평소 로봇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판단이 냉철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거 하나 갖고 성격을 다 무너뜨린 걸 보고 친구들이 매일 나에게 잔소리를 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친구들이 건넸던 말들만 듣고 살았어도 우울증에 걸릴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괜찮아? 걔 6학년 때 좋아하던 애 있었는데… 여자애가 싫다고 하는데도 계속 집착해서 걔 전학 갔었잖아. 원래도 전 여자 친구들이랑 친구들 죄인 만들어서 소문 이상했어. 근데 별로 안 퍼져서 계속 인기 많았던 거고. 전 여자 친구들 너 되게 불쌍해하더라. 그냥 제발 헤어져. 너 원래랑 달라. 너 지금 되게 슬퍼 보여. 제발 부탁이다. “

나는 그 친구들 말을 안 들은 게 인생 최대의 후회이다.


사실 나는 입에 담기도 힘든 피해들을 겪으면서도 그와 헤어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뀔 거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살았고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어느 순간 그 사람과는 바뀔 게 없을 것 같아 처음으로 그가 아닌 내가 이별 통보를 했고 그는 놀랍게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나를 여러 번 붙잡았다. 나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며 본인이 더 잘하겠다고 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 너무 한심하고 싫고 무서웠다. 이미 우울증이 여러 달 진행되고 있었던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사과하거나 무너지거나 매달리지 않았던 순간이었고, 그 이후로 우리는 학교에서 눈을 피하고, 차단을 했다가 서로 풀고는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친구와 있었던 문제들은 친구로 지내면서 나아지고 누가 봐도 행복한 삶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날들도 잠시, 나는 후유증으로 무한대의 우울에 빠지고 말았다. 내 우울증은 겨우 중학생의 삶에서 사람 하나 사라진다고 끝나지 않는 독한 놈이었다.


지옥 같았던 삶에서 애매하게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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