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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 May 05. 2024

후유증은 내 그림자였다

불행을 선택한 것은 나였다

(오늘 이야기에는 사람 이름이 나와야 몰입도가 커지는 문장들이 많아서, 가명임에도 따로 가명 표기를 하지 않을 예정이니 이 점 양해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그와 헤어진 지 한두 달쯤 지나고 나서 미련이 생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는 나를 계속 헷갈리게 했다. 그는 나와 헤어지고 나서부터 나에게 남은 미련을 조금씩 티 냈고, 나도 그랬다. 어느 정도는 그가 티 내는 게 보여서 넘어간 듯 하지만, 나는 행복해진 지 한두 달 만에 내 행복에 질렸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세뇌시킨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우울해야 한다. 나는 항상 슬퍼야 한다. 나는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본인을 매일 부정했다. 사실 나도 그런 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내 뚜렷한 슬픔에 익숙해져 희미한 행복이 너무도 어색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와 다시 사랑하게 되면 아프고 불행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일 우리 집에 초대했다. 예전처럼 밥도 같이 먹고, 같이 누워 안고 있고,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르고, 서로의 고민 상담과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한 내용이 아직 서로 정반대라는 건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칼같이 차가웠던 말과 행동에 조금 덤덤하게 대하는 것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였다. 학교에서는 그저 어색한 친구처럼, 집에서는 오래된 연인처럼, 집에 가면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나를 싫어한다는 말과 그 이유를 듣고도 예전처럼 상처를 받거나 눈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메뉴를 고르고, 같은 장소에 앉아서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설거지를 했다. 모든 걸 같이 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집에 가면 이 모든 순간이 끝나고 공허함이 자리 잡고는 연락 한 번도 해 볼 수 없다는 것이 좀 안타까웠다. 그래도 나는 내 베개에 남은 그의 잔향을 맡으며 텅 빈 밤을 보내곤 했다. 아직 우리 집 곳곳을 보면 그와 함께 한 흔적들과 그와 많은 일들을 한 공간들이 그대로 있는데 그만 밤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이 좀 힘들고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임에도 조금씩 애가 탔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도 신경 쓰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굳이 한 번 거하게 만났었던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매일 걱정했다. 사귈 때보다 나의 의견을 존중해 줄 것 같은 모습에 나는 내가 그런 모습들을 가려 주는 가림막이 되겠다며 나섰지만, 그는 여전히 무섭다며 나의 고백을 받아 주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또래보다 조금 정신적 성숙도가 낮은 그도 무조건 달려와 반갑게 만남을 다시 가졌을 것 같은데, 그는 계속 남의 시선이 무섭다는 핑계만 대며 나를 몇 달간 잡고 있었다. 그때는 뭐가 이상한지 몰랐다. 그는 우리 집에 왔다가, 잠깐 연락해 보면 그냥 답이 다 [웅]이었고 다시 우리 집에 오면 너무도 다정하게 나를 대했다. 중간에 우리 그럼 비밀로 사귈까?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길래 나는 또 그걸 좋다고 받았다. 발설하면 죽겠다고 각서까지 썼는데, 그가 "신뢰 문제만 좀 해결되면..." 하고 끝을 얼버무리기에 나는 사귀지 않는 줄 알았다.


그리고 이틀 후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덤덤하게 "야."라고 하기에 나는 "왜?" 하고 답했다. 그러더니 덤덤하게 "우리 헤어지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울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사귀지도 않았잖아."라며 라면에 말아먹을 밥을 퍼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사귄 것 아니냐며 당황했고 내가 오히려 난 이미 됐다 하고 사귀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서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며 솔직하게 얘기했고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때는 그 반짝임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을뿐더러 그는 나와 사귀었었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그냥 집에 보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우리 집에 오거나 나와 연락을 한다거나 학교에서 대화를 하는 일 등을 피했다.


이틀이 지났다.

나흘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났다.

이 주가 지났다.


나는 한 학년이 끝난 겨울 방학에도 이 주째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던 그를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이 주 동안 나는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았고 그에 더 바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노래를 부르고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가사도 써 보고 노래도 더 제대로 배우면서 밴드부 오디션 연습도 하고 싶어 보컬 학원을 몇 년 만에 다시 다녀 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보컬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아는 동생에게 계속 전화가 와서 부장님(현재 다니는 보컬학원의 작곡 수업 담당이신 부장 선생님이시다.)께 사과를 드리고 알림을 껐다. 그리곤 상담이 끝나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홍민지. 왜 전화했어?"

"언니! 지금 백하진(그의 이름을 매우 급하게 불러서 발음도 뭉개졌습니다.) 오빠 프로필 봐 봐."

"응? 그게 뭔 소리야. 걔가 왜?"

"아 빨리 보라고!"


평소 착했던 동생의 큰 소리에 놀란 나는 얼른 그의 SNS 프로필을 들어가 보았다. 음...? 그의 프로필에는 달라진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의 프로필에 그에 관한 내 고민을 모두 들어줬던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태그가 돼 있었고, 나는 직감이 왔다.

'얘네 사귄다.'


그리고 그걸 본 직후 나는 그와 그의 여자 친구(현재는 이 친구와 매우 친해져서 그의 얘기를 막 하곤 합니다.)가 함께 있는 단체 채팅방에 문자를 보냈다.


[사진을 보냈습니다.]

[뭐야? 너네 사귐?]

[@백하진 @고하령]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고하령

[난 모르겠다]

백하진

[디데이 못 봄?]


나는 의외로 덤덤했다. 아니, 옆에 엄마가 있어서 덤덤해 보이려 애썼다. 나를 사랑하는 줄만 알았던 그가 내 친구랑? 둘이 아주 잘 만났네 아주. 둘 다 배신감 느껴지게 하고 아주 자알 살겠다. 끼리끼리 만나는 거지 뭐. 그리곤 엄마에게 "엄마. 걔 있잖아, 그 내 전 남자 친구. 응. 걔 여자 친구 생겼대."라고 아주 덤덤하게 얘기했다. 엄마는 무슨 너 잡고 있던 애가 그런 짓을 하냐며 막 욕을 했지만 나는 차마 눈물을 흘리고 싶진 않아서(신기하게도 평소에는 그의 어떤 말을 들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 날은 나왔다.) 차분하게 "응. 걔 뭐 그럴 수도 있지. 나 두고 다른 여자 만날 때 됐어. 나 헤어진 지 반년은 됐잖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걔 1년에 여자 친구만 3명 사귀어 봤자 본인한테 나쁜 거지. 나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고 내뱉었다. 그리고는 온 힘을 끌어내 집에 도착해서는 억지로 다리 운동을 하며 풀린 다리를 복구시켰다.


그리고는 내 고민을 잘 들어주던 우리 학교 퀸카, 밴드부 여신에게 연락했다. 밴드부에 둘 다 소속되어 있으니 그 언니는 내 편에 서서 밴드부 선배로서 그에게 잔소리를 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 제일 유명했던 나와 그 언니 둘 조합으로 라이브 방송을 켰다. 이 상황을 상담받으면서 그를 찔리게 하고 싶었다. 사람은 많이 들어왔다. 한 이백 명 정도?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얘가 나를 헤어지고 한두 달쯤 돼서부터 한 이 주 전까지 나를 갖고 놀다가 연락이 끊겼길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가 생겨서 왔다고. 일부러 좀 짜증 부리는 투로 얘기했다. 댓글창은 그의 욕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언니, 들어왔다."라고 했다. 언니는 크게 웃으며 있는데 이런 얘기해도 되나? 하고 있었다. 마침 눈치를 챈 다른 밴드부 보컬 언니가 라이브에 들어와서 셋이서 웃고 떠들다가 종료를 했다. 나름 이 라이브로 마무리돼서 그를 쉽게 보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게 악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에게 갑자기 문자가 왔다.

나는 그와 내가 연락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일반 칸에 그를 넣어 두고 일반 칸에 알림이 뜰 때마다 기대하며 들어가곤 했는데, 일반 칸에 있으면 안 되는 알림이 하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진정하고 들어갔다.


[이도아]

응? 왜 얘가 이런 연락이 오지?

[왜]

[할 말 없어?]

[할 말 있을 것 같아서 왔나 보지?]

[무슨 뜻이야?]

[별 뜻 없어 뭐 할 말 있나 봐?]

[미안]

[또 미안하긴 해? 아냐 됐어]

[진짜 미안해. 받아 줘 사과 제발.]

[난 사과받을 생각도 없고 안 해도 돼 그냥 나 혼자 잘 살면 돼]

[아냐 내가 진짜 미안해서 그래]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름 강하게 나갔다. 딱히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연락을 빨리 끝내고 내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사과를 받길 권했다.


[너 이래 놓고 나중에 나한테 뭐라 할 거잖아. 사과 지금 받아 줘.]

[누가 그럴 거라고 했어? 나 되게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아니면 누가 널 이렇게 잘 아는데?]

[나겠지?]

[아니잖아. 너 맨날 너를 모르겠다며.]

[너 없는 이 주 동안 아주 잘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꺼질래?]

[솔직히 내가 뭘 잘못한 건데?]

[자기 잘못한 지는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래 아니다 내 잘못이 뭔데?]

나는 그가 나에게 미친 나쁜 영향을 모두 이야기했다.


[하 그래 잘 알았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필요 없어 너가 알려달래서 알려만 준 거야]

[배신감 느껴지지 않아?]

[느끼지 근데 너네 둘 다 꼴 보기 싫으니까 그냥 좀 꺼지라고]

[내가 미안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너가 나한테 주는 마음을 어떻게 거절할지도 몰랐고 내가 하령이 생각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너 앞에서 보여주기도 미안해서 최대한 숨기고 살려고 했고 차인 김에 다 잊고 그냥 너까지 정리하려고 했는데 그러기 전에 갑자기 고백 다시 하령이가 받아 줘서 그랬던 거야 진짜 미안해 내가 많이 잘못했어 그니까 나 용서해 주라 나 스스로한테도 너무 창피해서 그래]

[창피한 줄 알면 그러면 안 됐던 거 아니야? 너가 그렇게 어리지도 않고 거절을 어떻게 못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진짜 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그럴 의도 없었어 정말이야]

[아 응 믿어 그만 말해 역겨워]

[사과받아 줄 거야?]

[응 받을게 안 받겠다고 하기도 지겨워 죽겠어서]

[근데 왜 사과를 안 받았어?]


말문이 약간 막혔다.


사실 그의 사과를 안 받으려고 했던 이유는 내가 그에게 쏟은 감정, 시간들이 하나같이 모두 아깝고 너무 많이 소비되어서 내가 점점 초라해져가고 있었을 때쯤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거라 거의 마음을 접은 상태에서 소식을 접했었다. 마음을 접었다고 알고 있었던 나의 예상치도 못했던 충격들을 모두 부정하고 싶었고 이것들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감정과 시간은 돌려낼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마땅히 대신할 만한 것이 없는 단 한 번의 소모품이니까.


[딱히 내가 그런 것들을 말하고 짜증 내다가 사과를 받으면 그냥 내가 그동안 너한테 부은 시간 감정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 그냥 좋게 끝낼까 싶어서. 그런 거 다 너무 아까운데 내가 마지막까지 조금만 참으면 너랑 아무렇지 않게 남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너가 이걸 어떻게 보상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밴드부 오디션도 오늘 너 보자마자 너랑 인연 끝내고 다 포기하려고 했어. 그니까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거 없으면 그냥 말 안 걸어 주면 안 될까]


그리고 의외로 그의 답장은 명쾌했다.


[내가 너 원하는 거 뭐든 세 가지 들어줄 테니까 보상 개념으로 받아들여 줘. 진심이고 그 요구가 다 이뤄지면 나도 더 이상 이 일들로 터치 안 할게.]


그래서 나는 그에 맞는 명쾌하고도 현명한 세 가지를 내뱉었다.


첫 번째, 밴드부 오디션은 볼 테니 개인적인 감정 표출하지 않기

내가 밴드부 오디션을 볼 때 너의 감정이 최종 선택에 영향이 가지 않게 하면 좋겠다. 나도 용기를 내서 도전했고, 과거의 너와 같은 상황에 놓였으니 동정이라는 이유만으로라도 나를 정정당당하게 평가해 주면 좋겠다. 나도 꽤나 큰 도전을 하는 것이고, 너도 이 정도는 원래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지만 우리 관계가 이렇게 끝나면서 그런 생각에 영향을 줄까 봐 한 번 더 얘기해 본다.


두 번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도 신경 쓰는 너를 고통받게 하기.

우리는 헤어져서 너는 우리 관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 관계로 남게 해야겠다고 할 것이고 나도 방금까지 그랬지만,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색한 모습을 보고 어색한 분위기를 생성할 것이며 남들이 더 불편해질 상황을 너가 만들어내는 것도 싫다. 그러니 그냥 우리 예전처럼, 친구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유지하자.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쓴다면 남들의 시점도 생각해 주어야 하니까.


세 번째, 지금 여자 친구와 나보다 더 예쁘고 오래 사귀기.

나는 너가 여자 친구가 생기기 직전까지도 나와 너가 가장 예쁘게 사귄 연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우리 연애를 너의 행복한 연애에 덮어 나쁜 영향 가게 하기 싫다. 그러니 지금 여자 친구와 시끄럽고 행복하게, 나보다 더 행복해서 내 사건을 덮고 유연하게 흘러가도록 해라. 너네 연애하는데 내 이야기가 끼어들어서 너희의 연애를 일시정지 시키긴 나도 싫으니까.


내가 바란 것과 이유들은 딱 여기서 멈췄다. 그는 감동과 감사 등에 찬 어투로 말했다.

[고마워. 우리 이제 잘 살아 보자.]


그리고 나는 단 한 글자로 우리의 아픈 관계를 마무리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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