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강의 종이약국에서 수레국화 요양원까지 – 세계 마음 서점 순례
『종이약국』/니나 게오르게/박하/2015
『섬에 있는 서점』/개브리얼 제빈/문학동네/2017
『오후도 서점 이야기』/무라야마 사키/클/2019’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마르크 로제/문학동네/2020
Ⅰ
이유 없는 행복 – 책방의 행복
책은 마법이다. 향기다. 마음의 뿌리다.
어떤 책은 내 책장의 어느 한 구석에 꽂혀 있다는 사실 만으로 마법처럼 마음을 기쁘게 하고, 가슴 속을 은은한 행복의 향기로 채우며, 든든한 뿌리처럼 나를 지탱해 준다. 책 내용이나 명성은 관계없다. 나와 그 책 사이의 특별한 사연 때문에 단지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한다.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히페리온』, 아르투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어느 시인의 죽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히페리온』은 내겐 꽤 특별하다. 그 이유는 2가지다. 하나는 책을 산 동기다. 아무 정보도 없이 서점에서 우연히 들추어 본 책 역자 서문의 한 구절이 망설임 없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 책이 1,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젊은 독일 병사들의 배낭에 “보물처럼 간직돼 있었다”는 대목이었다.
또 하나는 서점의 기억이다. 이 책을 산 것은 1975년. 50년이 지났지만 그때 서점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내가 기억력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책 마지막 장에 태그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바코드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판매 관리, 도난 방지 등의 목적에서 서점마다 고유의 스티커 같은 것을 붙이고 도장을 찍었다. 유난이 이 책에는 서점 상호와 주소까지 인쇄된 태그가 붙어있다. 그래서 그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다.
서점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고, 당시 기준으로는 꽤 컸다. 요즘 대형서점에 비하면 한 코너 정도 밖에 안되는 규모일 수도 있지만. 점포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길에서도 안이 끝까지 훤히 보였고, 조명이 아주 밝았다. 양쪽 벽면을 천장까지 책이 가득 차 있었고, 『히페리온』은 통로의 가운데 매대에 있었다. 아마 신간 코너였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거기 서 있던 모습까지 기억난다. 그리고 그것은 내 생애 매우 행복한 기억 중 하나다.
이유 없는 행복. 책방이 주는 행복이다.
앞서 어두운 역사를 힘겹게 헤쳐 나왔다.(제 8, 9화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건배를 1, 2」)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그냥 책 읽는 즐거움에 빠지고 싶다. 그래서 선택한 서점 순례다.
Ⅱ
책과 사랑의 상처를 싣고 프로방스를 항해하다
여러분은 어떤 책방의 추억을 갖고 있는가?
요즘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특별한 서점이 많다. 그러나 내 추억 속의 책방은 무미건조하다. 단지 서점이라는 이유 만으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특별한 인테리어도 없고, 그냥 책이 벽을 따라 꽂혀 있고, 진열대에 놓여 있을 뿐인 단순한 책방. 그것으로 족하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만 지금 소개할 서점 같은 곳이라면 정말 특별하다. 실제 있다면 꼭 가보고 싶다.
『종이약국』/니나 게오르게/박하/2015
파리에서 출발해서 프로방스를 샅샅이 누비는 여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라는 것은 책이다. ‘종이약국’이란 말은 그러므로 책방이라는 뜻이다. 이 책방은 독특하다. 배를 파리의 센 강변에 묶어두고 서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약국일까? 서점 주인은 까칠한 남자 장 페르뒤. 그가 고객의 사연이나 현재 처한 정신 상태를 파악해 그에 맞는 책을 ‘처방’해준다. 그래서 ‘종이약국’이다. 말하자면 “실연 당했어? 그럼 이 책 읽어봐!” 하는 식이다.
작가 니나 게오르게는 독일 사람이다. 기자 출신 소설가로 로맨스 미스터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일 최고 권위의 상을 받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독일 작가가 프랑스를 무대로 작품을 썼다는 것도 조금은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파리는 로맨틱한 이미지를 가진 도시다. 그 중에서도 센 강, 그리고 거기에 떠 있는 배가 서점이고, 더욱이 그 서점에는 책을 처방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사람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중 삼중으로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책 표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사랑으로 초토화된 가슴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책방 주인 페르뒤는 다른 사람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는 데는 ‘선수’이지만, 알고 보면 정작 자신의 상처를 깊이 묻어두고 있는 사람이다. 치유할 수 없는 아픔,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절망적인 사연이 숨어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돌연 강변에 묶어둔 줄을 풀고, 닻을 올린 다음 여행을 떠난다. 서점이 항해하는 배가 되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강과 운하를 따라 내려가면서 프로방스 곳곳을 여행한다.
장 페르뒤가 이처럼 긴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한 계기는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상처를 꽁꽁 싸매 두었던 봉인을 푼 것이다. 그에게는 20년간 열어보지 않고 보관 중인 편지가 있다. 전 연인의 마지막 편지. 그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랑했던 사람, 마농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편지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만에 열어본 편지는 그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드러난 진실은 마농이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페르뒤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떠난다는 것이었다. 마농은 페르뒤에게 자신이 떠난 뒤 “당신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한다.
페르뒤는 결국 지난 20년 동안 진실을 외면하고, 마음 문을 닫고, 벽을 쌓고, 그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두어 놓은 것이다. ‘책’이라는 ‘약’으로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상처는 억누르고 묻어놓은 채 애써 외면하면서 홀로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묶은 줄을 끊고 배를 띄운 것은 스스로를 가둔 감옥의 족쇄를 끊은 것이었다. 진심으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그 열린 마음 속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닫은 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책을 처방한 것은 진정한 치유가 아닌 ‘기술적인’ 조언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공감이 없었고, 소통이 없었다. 강변에 매여 있던 그 속박을 끊어 냄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공감과 소통의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묶인 줄을 끊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열리고 풀어질 리는 없다. 그러므로 멀고도 긴 항해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어 나가는 것은 그동안 맺혀 있던 무수한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배에는 페르뒤 혼자가 아니라 또 다른 상처입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렇게 함께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고통을 나누면서 조금씩 상처로부터 자유를 찾아간다. 이는 스스로를 과거에 가둔 사람이 다시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는 전편에 펼쳐지는 로맨틱한 프로방스 여행이다. 배를 타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운치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그 모든 지역이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로 연결이 되어있단 말인가? 가능하다. 프랑스 내륙은 강과 강을 연결하는 운하 등으로 무려 8,500km의 수로가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묘사된 여행은 완전히 가능하다!
또 다른 매력은 삶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묘사다. 대화, 표정, 움직임 등이 바로 옆에 있는 이웃 사람들처럼 인간적이고 수수하다. 사람 사는 냄새, 좋은 의미에서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이다. 마치 손을 뻗으면 작중 인물이 마주 손을 잡아올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등장인물들을 친근하게 느껴지게 하고 그래서 곧 우리의, 나의 이야기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과거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다면, 아직도 옛 사랑의 상처에 아파하고 있다면 바로 이 『종이약국』이 특효를 발휘할 ‘처방’이다..
Ⅲ
상실과 회복의 이야기 – 서점이 있는 섬
서점 주인들은 까칠하다. 실제 그럴까? 적어도 서점을 무대로, 책을 주제로 한 소설에서는 거의 모든 서점 주인이 까칠하다. 앞서 소개한 『종이약국』의 장 페르뒤가 그렇고, 이후에 소개될 서점 주인들도 그렇다. 물론 소설의 경우, ‘소설이기 때문에’ 반전이 있다. 그 까칠함에 깊은 뜻, 또는 사연이 숨어있는 것이다. 어디 소설만 그렇겠는가?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 않을까?
여기 또다른 까칠한 서점 주인이 있다.
『섬에 있는 서점』/개브리얼 제빈/문학동네/2017
출판사 영업사원 아멜리아가 배를 타고 앨리스라는 외딴 섬으로 간다. 물론 영업이 목적이다. 별로 실적이 기대되지도 않는 시큰둥한 출장이다. 게다가 도착해서 서점 주인 A. J. 피크리를 만났더니 까칠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바로 감이 온다. “둘 사이에 연정이 싹트겠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고 그런 소설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고,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마음에 잔잔히 와 닿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크고 무거운 그 무엇임을 느끼게 한다.
지은이 개브리얼 제빈은 하버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1977년생 미국 작가다. 독특한 시선, 재치 있는 구성, 유머러스한 문체가 특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섬에 있는 서점』은 2014년 작품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람이 까칠한 이유 중 꽤 일반적인 것으로 2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상실의 경험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상실의 고통을 견디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상처가 알게 모르게 작용한다. 둘째로는 뚜렷한 주관이다. 자기 전문 분야에서 타협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고집스럽고, 이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까칠하게 느껴진다.
이 책의 주인공 피크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아내를 잃은 고통을 견디고 있고, 문학에 조예가 깊어 책을 선택하는 취향이 독특하다. 게다가 그가 운영하는 서점은 고립된 섬에 있다. 한마디로 장사는 글러먹은 것이다. 대도시의 수많은 서점 중 하나라면 그 까칠함이 특색이 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서점은 점점 쇠락해간다. 폐업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이런 상황이 되면 보통 스스로를 과거에 가둔다. 앞서 소개한 『종이약국』의 장 페르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섬이라는 고립된 작은 공동체는 또한 뭔가 다른, 끈끈한 인간적인 연결고리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오히려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어떤 계기가 있으면 서로 상처를 보듬으면서 회복으로 가는 선순환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
피크리에게, 또 섬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사건이 생긴다. 피크리는 자신이 아끼는 희귀본 책을 잃어버리고, 섬에는 또 작고 예쁜 여자 아기 마야가 버려진다. 피크리는 마야를 돌보게 된다. 당연히 마야가 섬에 버려진 데는 사연이 있다. 또 피크리의 친구, 처형 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전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은 섬 사람들의 독서 모임도 이어지고, 피크리와 아멜리아도 문학 취향을 매개로 사이가 가까워진다. 대개 까칠한 사람에게는 또다른 까칠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매력이 있는 법이다. 피크리와 아멜리아처럼.
그러면서 서점은 다시 활기를 띄고, 주인인 피크리는 아멜리아, 마야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지역사회는 서점을 중심으로 좋은 인간관계로 맺어지고…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듯하다. 그렇다면 서두에 뻔한 예측을 한 것처럼, 뻔한 결말이 되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피크리가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일까? 또한 그렇지도 않다.
이것은 상실과 회복의 이야기다. 피크리는 작품의 무대가 되는 섬과 함께 고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고립은 책이, 서점이 매개가 되어 끈끈한 연결로 승화된다. 거기에는 마야라는 소중한 어린 생명과 섬의 모든 사람들이 나누는 생명의 기운, 사랑의 기운이 있다. 피크리는 죽어가지만, 거기에는 소중한 삶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비극이 아니다.
또 한가지 이 책이 주는 재미는 근 100편에 달하는 문학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 13개 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각 장은 실제 단편 소설이나 작품이 피크리의 짤막한 논평과 함께 소개된다. 이것은 피크리가 마야에게 건네는 메시지처럼 읽힌다. 이들 작품 중 관심이 가는 것들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Ⅳ
벚꽃 만발한 시골 마을 작은 서점
나는 낯선 도시에서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중소도시의 중심가나 그 근처가 좋다. 그렇게 걷다가 서점을 만나면 반갑다. 어느 도시든, 오랜 세월 그곳 사람들의 독서와 아이들 참고서를 책임져 온 서점이 한두 군데 있기 마련이다. 그런 곳에 가면 괜히 책을 한 권 사기도 한다. 책이야 어디서 사든 똑 같은 책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면 그 책은 사연 있는 책이 된다.
오래 전에 일본에서 만난 서점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대기업의 공장 하나가 주민 모두를 먹여 살린다고 하는 소도시다. 철도역을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건물과 상가가 늘어서 있고, 도로는 가끔 자전거가 지나다닐 뿐 차는 거의 보이지 않는 한산한 곳이었다. 그 ‘중심가’에 도시 규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큰 서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서점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펼쳐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서점은 상가 건물 1층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외견상으로는 서점이 상가의 중심이고, 그 상가는 시가지의 중심인 것처럼 보였다. 한 소녀가 자전거를 세워두고 서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기억에 새겨졌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치 그 서점을 무대로 한 것 같은 소설을 만났다. 『오후도 서점 이야기』.
『오후도 서점 이야기』/무라야마 사키/클/2019
‘오후도’가 섬인 줄 알았다. 일본 섬 이름이 ‘00도’일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착각을 한 것은 『섬에 있는 서점』을 읽은 후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오후도’는 서점 이름이다. ‘오’는 桜(앵), 즉 벚꽃을 뜻하고 ‘후’는 風 (풍), 즉 바람이다. ‘도’는 집 ‘당(堂)’.
앞서 읽었던 『종이약국』이나 『섬에 있는 서점』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작품이다. 작가무라야마 사키는 원래 동화 작가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약간 동화 같은 분위기를 띈다. 당연히 ‘일본스럽다’는 느낌도 있다. 스토리를 아기자기하게 예쁘게 꾸몄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편하게 그 ‘느낌’을 즐기면 된다.
오후도 서점은 시골 마을 사쿠라노마치에 있다. 표지 그림에서 보듯이, 또 마을 이름이 그렇듯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다. 대도시 ‘긴가도’ 서점에서 일하던 주인공 잇세이는 불의의 사고로 직장을 떠나게 된다. 책을 훔치는 소년을 발견하고 뒤쫓았는데, 그 소년이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에 비난 여론이 들끓어 잇세이가 그만두게 된 것이다. 잇세이는 전부터 가보고 싶어했던 시골 마을의 독특한 서점 ‘오후도’로 간다. 그곳에서 뜻밖에 서점 운영을 맡게 된다. 오후도 주인이 몸이 아파 잇세이에게 운영을 부탁한 것. 원래 ‘숨은 명작’을 찾아내는 뛰어난 감각을 가진 잇세이는 자신의 실력과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오후도를 마을의 삶의 중심으로 가꾸어 나간다.
잇세이가 오후도 서점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긴가도 서점에서는 잇세이가 찾아놓은 ‘숨은 명작’을 알리고 판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책 진열에서 띠지 포스터 만들기 등에 이르기까지 서점의 자잘한 일상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흔한 말로 서점 직원들의 ‘애환’이니, ‘좌충우돌’이니 하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상투적인 표현으로 뭉뚱그리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공동체의 마음을 모으는 구심점으로서의 서점을 세우고 유지해 나가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과일이나 생선과 달리 썩거나 상하지 않는다”거나 “꽃이나 나무나 새가 아니니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서점도 책도 끊임없이 돌보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서점인들이 그냥 단순히 어떤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원석을 깎아 가치 있는 보석을 만들듯이 ‘책’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소통이다. 업무적인 소통도 중요하지만, 고객 즉 독자와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한 광고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소통이어야 한다. 그 진심이 전해졌을 때 비로소 ‘숨은 명작’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서점인들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에게 책 한권이 와 닿는다. 그런 마음과 독자가 만나는 공간이 바로 서점이다. ‘오후도’나 ‘긴가도’는 바로 그런 서점과 서점인을 이상화한 곳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하다.
서두에 말한 일본 시골 소도시와 그곳의 서점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단편적인 기억을 AI에게 알려주고 찾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사가현 토스시(鳥栖市) 아부라야 본점(油屋本店)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오후도와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나는 왠지 책을 읽는 내내 이 서점을 떠올렸다.
Ⅴ
삶의 끝자락에서 읽는 책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마르크 로제/문학동네/2020
인생의 마지막 스테이지, 요양원에서 책은 어떤 의미일까?
여기에 또 까칠한 서점 주인이 등장한다. 다른 점은 현역이 아니라 전직 서점 주인이라는 것. 바로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 씨다. 그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다. 그레구아르는 갓 스물 사회 초년병으로 책과는 담을 쌓아온 학교 성적 하위 20%에 속하는 친구다. 반면 책방 할아버지는 문학에 조예가 깊어도 보통 깊은 사람이 아니다. 책 3만 권 중에서 고르고 골라 3천 권을 가지고 ‘수레국화 요양원’에 들어와 살고 있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진득한 우정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감동적인 서사를 연출한다.
그레구아르는 전체 응시자의 80%가 합격한다는 프랑스 대입 자격시험 바칼로레아에 낙방하고 시청 녹지과에서 하루 종일 잔디 깎고 낙엽 쓸어내다가 힘들어서 때려 치고, 수레국화 요양원에 잡역부로 들어왔다. 어느 날 휴가 간 직원 대신 대타로 각 병실에 식사 배달하다가 책방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렇게 요양원에서 ‘자리를 잡아 가면서’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 씨와도 친분을 쌓아간다.
피키에 씨는 파킨슨 병에다 녹내장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레구아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피키에 씨는 요양원 원장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고, 그레구아르는 하루 1시간씩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된다. 힘든 주방 일 또는 세탁 일에서 1시간을 벗어나는 것에 쾌재를 부르면서… 이렇게 시작된 책읽기는 요양원의 두 할머니가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점점 확대된다. 학교에서 책 읽기 0점이었던 그레구아르는 책방 할아버지의 지도로 훈련을 받고 전문 낭독가 수준으로 발전한다.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 씨는 생애 마지막 도보 여행을 떠난다. 그레구아르가 여행을 하고 그 상황을 실시간 문자로 알려주는 대리 여행을.
지은이 마르크 로제는 전문 낭독가다. 이 책은 그가 쓴 첫 소설이다. 그래서 책 낭독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무대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요양원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처음 책 낭독에 청중으로 합류했던 전직 음악교사 모렐 부인은 임종 때 그레구아르가 책을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지루 부인은 요양원에서 비로소 만난 진정한 친구 모렐 부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자살해버린다. 변기 배관을 통해 책 낭독 ‘방송’을 하는 기상천외한 헤프닝도 벌어진다. 연애 사건도 있고, 주방과 세탁실에서 벌어지는 직원들 간의 험담도 재미있다. 파키에 씨가 ‘읊어대는’ 수많은 작가와 작품도 주목거리다. 아무래도 프랑스 작가들 중심이라 접해보지 못한 것이 많지만.
그리하여 이 작품은 책읽기를 뼈대로 인생의 굴곡을 하나하나 살펴간다. 우정이 있고, 성소수자의 고뇌도 있다.(파키에 씨는 게이다)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케 한다. 한 청춘의 성장 소설이자, 두 인격체의 우정에 관한 소설이며, 한 노인의 삶을 마무리하는 소설이다.
파키에 씨는 솔직하게 죽음에 직면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죽고 싶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 시시껄렁한 삶은 이만하면 충분해. 하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그래. 나는 죽음이 두려워. 그 두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거지. 저 너머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뭔지 모르는 채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넘어간다는 것. 어떤 대상을 믿고 죽은 후에 지옥과 연옥과 천국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하겠지.”
책 읽기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들어볼 만하다.
“책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란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나와 가까운 타자는 없기 때문에,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 거야.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타자인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행위와도 같은 거지. 설령 그저 심심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해도 마찬가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