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한 식물학적인 분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스웨덴의 생물학자 린네(Linnaeus)입니다. 1753년, 그는 커피의 학명을 코페아 아라비카(Coffea arabica)로 정했습니다. 린네는 인간의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곧 생각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명명한 학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식물의 학명은 그 식물의 고향을 의미하는 라틴어나, 그 식물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여 정합니다. 코페아 아라비카는 아라비아에서 온 식물이라는 뜻을 가진 학명입니다. 그런데 린네가 정한 커피의 학명은 커피의 원산지에 대한 오류가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커피의 고향은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입니다. 현재의 에티오피아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커피의 학명은 코페아 아프리카(Coffea africa), 아프리카에서 온 식물이 맞습니다.
1700년대 당시, 커피는 미지의 식물이었습니다. 린네는 커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아프리카에 간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온실에서 자라고 있던 몇 그루 커피나무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린네가 본 커피나무들은 예멘에서 밀반출된 커피나무의 후손입니다. 코페아 아라비카라는 학명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린네가 본 커피나무는 현재 70여 개국에서 경작되고 있는 아라비카의 조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커피는 100만 년 전 아프리카 숲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식물은 로부스타로 잘 알려진 코페아 카네포라(Coffea canephora)와 코페아 유게니오이데스(Coffea eugenioides)의 자연교배종입니다. 자연교배에 성공한 지 수만 년이 지난 후, 야생 아라비카는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 아라비아반도 남쪽, 현재 예멘 지역에서 경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한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학자들은 1500년대 안팎으로 추정합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떠난 아라비카는 아시아 예멘에서 농작물로 순화(馴化)되었습니다. 야생 아라비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길들여졌습니다. 마치 늑대가 개로 순화된 것처럼 아라비카는 그곳에서 오랜 기간 농작물로 변화된 종(species)입니다.
린네의 분류에 의하면 커피는 꼭두서니 과(family)의 코페아 속(genus)에 속한 식물입니다. 코페아 속에는 약 100여 종의 커피나무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코페아 아라비카는 코페아 속(genus)에 존재하는 100여 종의 커피나무 중 아라비카라는 ‘종(species)’을 의미합니다.
종(species)은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생물학적 분류입니다. 사실 종을 넘어서는 분류는 생물학 차원 이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독일의 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Ernst Walter Mayr)의 정의에 의하면 종이란 (1)서로 번식이 가능하고, (2)서로 간에 자발적으로 번식 행위를 하며, (3)그렇게 해서 나온 자손이 번식 능력이 있는 무리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종이란 “번식 가능한 2세를 생산할 수 있는 무리”입니다.
100여 종의 커피나무 중 인간에게 우연히 선택, 길들여진 아라비카의 서사는 커피역사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다음 지도는 스페셜티커피협회(SCA)에서 제작한 코페아 아라비카의 확산 경로, 곧 커피역사의 여정과 흐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 그리고 최초의 경작지 예멘에서 신화형태로 구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사실, 곧 조사되어 기록된 커피역사는 제한적입니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이며 그곳에는 오래된 커피문화가 있지만 커피역사는 불분명합니다. 홍해 건너 아라비아 반도의 커피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1400년대 메카에 카베 카네(Qahveh Khanehs)라는 커피하우스가 존재했다는 기록과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sufi)들이 커피를 마셨다는 흔적은 있지만 이들이 즐겼던 커피가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의 커피수요는 홍해 건너 에티오피아의 야생커피로 공급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세계유일의 커피생산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오스만제국이 이슬람문화권 대부분을 통치하던 1500년대, 커피는 오스만제국의 문화로 수용되었습니다. 계속 늘어나는 이곳의 커피수요를 에티오피아 야생커피로는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스만제국은 예멘에서의 커피경작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오스만은 1299년에서 1922년까지 623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일부를 통치한 가장 크고 넓으며 오랫동안 존재했던 제국입니다. 오스만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기독교, 동방정교회,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아랍인, 유대인 등 종교와 민족의 다양성이 공존했던 포용적인 사회였습니다. 커피문화는 이러한 포용적인 문화의 사회적 장치로서 수용되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의 천년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습니다. 오스만은 그곳으로 오스만의 수도를 옮기며 이스탄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1475년,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스탄불에 등장했습니다. 키바한(Kiva Han)이라는 사회적 공간, 제3장소가 이스탄불에 등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다양한 사회문화 활동을 즐겼습니다. 여성의 출입 제한을 제외하면 이곳의 문화사회적 기능은 동시대 카페와 같습니다. 오스만은 커피의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에서 커피는 귀족부터 일반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수평적인 음료였습니다.
1512년, 오스만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침략, 정복했습니다. 오스만 침략 이전 이곳에는 이미 커피문화가 존재했습니다. 커피와 커피문화는 더욱 빠르게 오스만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커피는 이슬람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당시 커피는 북아프리카에서 인도 무굴제국에 이르기까지 이슬람문화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커피수요는 더욱 증가하며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된 야생커피만으로는 제국의 커피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1544년, 오스만의 지도자 이맘(Imam)은 예멘에서의 커피경작을 기획, 추진합니다. 이 기획은 오스만의 정치경제적 판단인데 이후 커피의 (경작) 확산에는 언제나 이러한 판단이 개입됩니다. 커피는 커피생산지역 농부들을 위한 작물이 아닙니다. 권력의 기획에 의해 강제된 경작이 대부분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생산국이자 커피소비국입니다. 농부 자신을 위해 커피를 경작하는 경우는 에티오피아를 제외하고 거의 없습니다. 커피는 특정 권력과 자본에 의해 기획된 상품입니다. 실제로 이때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커피는 제국과 제국주의에 의해 기획된 문화상품의 특성을 갖게 됩니다.
오스만의 기획에 의해 예멘의 농부들은 높은 산등성이에 계단식 밭인 테라스(terrace)를 만들어 커피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커피의 고향 에티오피아와는 전혀 다른 생태환경이었지만 커피나무는 잘 자라 주었습니다. 오스만의 기획은 성공했습니다. 그때부터 오스만은 이슬람 문화권은 물론 전 세계 커피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으며 에티오피아를 제치고 세계적인 커피 수출국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의 커피와 커피문화는 유럽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와 바다를 사이에 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럽의 커피역사가 시작됩니다. 오스만에서 커피하우스가 처음 등장한 지 150년이 지난 1645년,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베네치아에서 개점한 것입니다. 유럽 최초의 사회적 공간이 등장한 것입니다. 커피하우스처럼 문화적이며 소통이 가능한 사회적 공간은 유럽에서 환영 받았습니다. 오스만의 커피와 커피문화는 유럽에 스며들기 시작했으며 쉽게 대중화되었습니다.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도 1651년 옥스퍼드에 문을 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커피하우스는 1689년에 독일의 첫 번째 커피하우스는 1670년에 등장했습니다. 1689년, 미국에도 커피하우스가 등장했습니다. 커피와 커피하우스는 글로벌 (메가)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커피문화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며 이에 따른 커피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700년대 초반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통되는 모든 커피들은 오스만의 예멘에서 생산된 것이며 그곳의 항구도시 모카(Mocha)에서 선적, 수출된 것입니다. 오스만의 커피는 모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모카는 곧 커피를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됩니다. 모카는 유럽 상류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의 커피는 문화적으로 독보적이며 경제적으로는 독점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커피는 오스만의 핵심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은 자국의 커피산업을 보호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커피씨앗과 커피나무 해외반출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161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의 피터 브로케(Pieter van den Broecke)는 커피나무 밀반출에 성공했습니다. 이 밀반출 사건은 훗날 제국 커피산업의 해체와 유럽의 식민지 커피 플랜테이션, 노예무역의 시작을 알리는 변곡점이 됩니다. 밀반출된 커피나무는 암스테르담 식물원으로 옮겨져 종자나무로 관리되었습니다. 이 커피나무의 후손들이 린네의 관심을 끌었으며 카페아 아라비카라는 학명을 받았고 현재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아라비카의 조상나무가 되었습니다.
이후 1650년, 인도의 이슬람 승려인 바바부단(Baba Budan)이 커피씨앗 밀반출에 두 번째로 성공했습니다. 바바부단이 인도에 심은 커피나무는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인도의 생태환경은 에티오피아와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바바부단의 커피나무들은 실론(Ceylon) 섬을 경유해 인도네시아 자바(Java) 섬에서 경작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인도의 커피나무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식물원으로 보내기지도 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증식된 커피나무들은 프랑스 황제 루이14세에게 보내졌고 이곳에서 다시 카리브 섬들을 경유해 라틴아메리카로 확산되었습니다.
1616년 네덜란드, 1650년 인도에 의했던 커피종자 밀반출은 오스만 커피독점의 붕괴화 함께 새로운 형태의 커피산업, 커피 플랜테이션의 등장을 의미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시도된 커피 플랜테이션은 커피농업의 혁신을 의미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통적 농업방식에 의존했던 오스만의 커피독점은 1700년대 초반부터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혁신적인 (노예적 노동) 농법에 의한 자바커피의 등장으로 모카커피의 역사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예멘 모카커피의 쇠퇴를 또 다른 역사적 사건에서 찾기도 합니다.
1683년, 비엔나전투에서 오스만의 패배는 오스만의 몰락과 함께 세계커피문화의 주도권이 이슬람에서 기독교의 유럽으로 넘어간 사건입니다. 전투에 패배한 오스만의 병사들은 대량의 커피원두와 함께 커피씨앗을 남겨두고 퇴각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합법적인 전리품 (예멘에서 불법 밀반출한 것이 아닌) 커피씨앗이 종자가 되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로 확산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1616년, 1660년 밀반출된 커피종자들은 이미 유럽 식민지 이곳저곳에서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83년 합법적 전리품으로 확보된 커피씨앗이 유럽 (식민지) 커피생산의 결정적 계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스만 커피독점의 해체 이후, 새로운 형태의 커피경작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농업으로서의 커피생산 방식과 커피산업 구조는 이전 시대와는 완벽하게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이때 시작된 커피생산의 메커니즘은 1800년대 후반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이 구조와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식민지 #동인도회사 #커피 플랜테이션 #원주민 노동 #노예무역 #노예 노동 #커피대량생산 #커피대량소비 #제1물결 커피.
앞서 본 스페셜티커피협회(SCA)의 커피확산 지도는 유럽식민지의 확산경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프랑스 서인도회사의 활동영역, 커피 플랜테이션의 거점, 노예무역과 노예적 노동이 발생했던 지역 분포와 일치합니다. 오스만의 모카커피 이후 새롭게 등장하는 커피역사는 유럽제국의 식민지역사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됩니다.
식민(植民, colon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정치, 경제적으로 본국과는 차별적으로 대우하면서 본국의 주민들이 이주, 개척하여 활동”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식민지는 식민 지배를 받는 대상국으로, 식민제국에 의해 국가로서의 주권을 사실상 또는 법적으로 상실한 나라를 의미합니다. 식민지는 정치적으로는 종주국인 식민제국의 종속국이 되며, 경제적으로는 본국에 대한 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 자본 수출지역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616년, 오스만 예멘에서 커피나무를 밀반출한 사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직원이었습니다. 식민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꿈빼니(compagnie),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습니다. 세계최초, 최대의 주식회사로 미화된 동인도회사는 유럽제국 식민지주의의 첨병이자 그들 자본과 권력을 대리하는 무장세력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군대와 함께 식민지에서의 사법권도 가져 마음대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재판했으며, 재판 결과에 따라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을 집행하는 권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의 커피는 물론 무역과 경제를 200여 년간 장악, 착취했습니다. 자바커피는 동인도회사가 기획, 생산한 상품인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커피 경작방법은 질적, 양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플랜테이션(plantation)이라는 개념이 커피농사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입니다. 농업에서 플랜테이션이란 자본과 기술을 가진 선진국, 또는 거대기업이 식민지, 또는 제3세계에서 기획하는 기업형 농장을 의미합니다. 플랜테이션을 위한 노동력은 그 지역 기후에 견딜 수 있는 원주민이나 이주노동자, 혹은 강제적으로 동원된 노예로 충당했습니다.
플랜테이션은 경제적 효율을 위해 단일경작(單一耕作)을 지향합니다. 플랜테이션은 해당 지역에서 소비할 목적으로 경작되는 작물이 아닌, 글로벌 상품으로서 가치가 큰 향신료, 기호품, 원자재(commodity)를 생산하여 세계 각지로 수출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1650년대 유럽의 커피소비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커피는 설탕과 함께 신분을 상징하는 값비싼 사치품이었습니다. 커피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인기상품이었습니다. 당시 커피수입을 위해 지출되는 비용 때문에 유럽의 국가들은 재정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스만의 커피독점은 치밀해서 커피종자는 해외반출금지였습니다. 커피종자를 밀반출한다 해도 유럽에서 커피경작은 불가능했습니다. 커피는 커피벨트, 곧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에서만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의 커피수요를 책임지는 커피무역의 강국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식민지) 커피생산을 기획하기 시작합니다. 커피가 큰 돈이 될 것을 예측했습니다.
커피생산국 네덜란드가 되기 위해서는 #커피벨트 지역의 식민지 #국가권력을 대리하는 동인도회사 #커피 플랜테이션 #원주민 노동이라는 핵심 전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1658년,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은 실론(Ceylon) 섬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구축합니다. 1616년, 예멘에서 밀반출한 커피나무의 후손이 이곳에 심어졌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첫 번째 커피 플랜테이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이후 다양한 실험이 지속되며 커피의 생태학과 플랜테이션 운영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들이 축적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두 번째 플랜테이션은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서 시작됩니다.
1696년, 자바의 평지에 구축된 두 번째 커피 플랜테이션은 홍수에 또다시 초토화되었습니다. 1699년, 세 번째 커피 플랜테이션을 높은 산등성이에 구축했으며 커피나무를 인도에서 공수했습니다. 1650년, 인도 승려 바바부단이 예멘에서 밀반출해 키운 커피나무의 후손들입니다. 결국 세 번째 플랜테이션은 성공했습니다.
1707년, 네덜란드는 자바의 고원지대에 본격적인 플랜테이션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자카르타의 무역항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커피 재배에 유리한 고원지대였습니다. 1711년, 이곳에서 처음 수확한 소량의 커피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습니다. 이 커피는 암스테르담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암스테르담 노동자의 하루 임금인 1kg당 약 20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자바커피의 명성이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자바커피의 성공에 고무되며 1717년 남아메리카 수리남(Suriname)에도 플랜테이션을 새롭게 기획, 구축했습니다.
1726년, 자바에서 생산된 2,000톤의 커피가 유럽 대륙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전까지 유럽을 지배하던 모카커피는 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는 커피생산국이 되며 암스테르담은 세계 커피의 수도가 됩니다. 커피애호가들은 모카와 자바로 양분됩니다. 우연적, 필연적 과정을 거쳐 모카자바 블렌드가 만들어지며 호사가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합니다.
커피는 더욱 대중화되며 수요는 늘어납니다. 고무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커피농사를 강제로 의무화합니다. 원주민은 그들의 주식 대신 커피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물론 꿈빼니들은 원주민이 굶어 죽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바의 커피생산과 커피무역은 막대한 부를 네덜란드에 주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소국 네덜란드는 자국보다 면적이 50배나 넓고 인구도 10배 이상 많은 인도네시아를 부의 화수분으로 생각했습니다. 1800년대, 네덜란드 정부세입의 50%는 이곳 식민지에서 창출되었습니다. 1945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합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 기간은 16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340년 동안이었습니다. ☕■
#제국주의 #무역의 역사 #중상주의 #노예무역
The REAL Reason Europe Took Over the World
*영상제작: Johnny Harris, *2023, *17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9XECUXXbjhU
#인도네시아 역사, 지정학 #네덜란드 식민지주의 #동인도회사 #커피 플랜테이션 #인도네시아 독립
How the Dutch Shaped Indonesia
*The Present Past, *2023, *12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Zzv8URa3G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