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짧은 커피역사 B: 생도맹그, 산토스

by doklip coffee



#1.유럽의 커피수요와 공급의 역사


1600년대 중반, 유럽에 커피하우스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커피는 100% 수입품으로서 왕과 귀족의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리고 100년 후인 1700년대 중반, 커피는 유럽 고급문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철학자, 예술가, 혁명가들이 커피를 즐겼으며 커피하우스는 이들의 아지트였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커피생산국이었으며 그들의 식민지 동인도, 서인도의 플랜테이션은 문제없이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또 100년 후인 1800년대 중반, 커피는 유럽의 대중문화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중산층은 물론 노동자 계급도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커피수요에 대한 공급처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착취하는 브라질의 커피 플랜테이션이었습니다.


1791년, 영국의 윌리엄 폭스(William Fox)는 “설탕 1온스(28g)는 인간의 살 2온스와 같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노예노동에 의해 생산된 설탕 불매운동을 주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불매운동은 당시 설탕 소비를 크게 줄이며 결국 영국의 노예해방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영국의 설탕수입업자들은 자신들이 수입하는 설탕은 노예노동과 무관한 것이라는 문구, 마치 동시대 공정무역의 사인과 같은 것을 인쇄해 붙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1700년대 후반 당시 설탕물매운동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을 그린 삽화입니다.


모카자바.jpg


당시 유럽의 커피는 마치 설탕처럼 노예제의 역사와 연동되어 있습니다. 1700년대, 1800년대 커피생산은 아시아 원주민과 아프리카 노예들의 노동력 없이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00년대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자, (자유, 정의, 평등) 혁명가들은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한잔커피를 즐겼습니다. 1800년대 유럽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 그때 노동계급의 혁명과 평등을 주장했던 마르크스, 엥겔스 또한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단 한 번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스콧 헤인(W. Scott Haine)의 저서 『파리 카페의 세계: 1789-1914년 프랑스 노동계급의 사회성(The World of the Paris Cafe: Sociability among the French Working Class, 1789-1914)』에 따르면 카페 프로코프 개업 100년 후인 1789년, 프랑스 파리에는 3,000개의 카페가 도시를 활기차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40년대 후반에는 4,500개, 1870년에는 22,000개, 1880년대 중반에는 42,000개, 그리고 1880년대 후반부터 1차대전이 시작된 1914년까지, 유럽 최고의 전성기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에는 30,000개의 카페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 인구가 350만 명임을 고려할 때 역사적인 기록수치입니다.


1700년대 초반부터 유럽의 커피문화가 확산하면서 커피수요는 급등합니다. 수요는 증가하지만 공급은 예멘 한 곳으로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커피무역은 네덜란드가 거의 독점했습니다. 1700년대 초반부터 네덜란드는 커피 (식민지) 생산국의 지위에 오릅니다. 1726년 처음 수출을 시작한 자바커피는 순조롭게 생산량을 유지했으며 이어서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커피 생산량은 자바를 추월하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커피무역과 커피생산을 함께하는 커피제국이 되었습니다. 카페의 나라 프랑스는 커피제국 네덜란드를 부러워했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커피생산국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리고 곧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제치고 세계1위 커피생산국이 됩니다. 세계 커피생산지와 커피 생산량의 변화를 추적한 두 개의 그래프를 참고하겠습니다. 아래 그래프들을 보면 1700년대부터 동시대까지 늘어나는 커피수요와 이러한 수요와 연동된 공급의 관계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래프는 논문 「18세기 노예기반 커피와 세계상품사슬에서 네덜란드의 역할(Slave-based coffee in the eighteenth century and the role of the Dutch in global commodity chains)」에서 발췌했고 두 번째 그래프는 오스트리아 얀젠(Oestreich-Janzen)의 논문 「커피화학(Chemistry of Coffee)」에서 발췌했습니다.


#생도맹그 산토스1.jpg


위 그래프에 따르면 1700년대 초반, 예멘(Yemen, 회색 점선)에서 유럽으로 수입된 커피는 약 800만 파운드입니다. 이어서 인도네시아(Dutch East, 주황색)는 예멘보다 적은 약 500만 파운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700년대 초반, 네덜란드 식민지 수리남(Dutch West, 하늘색)과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French West, 회색)에서 커피생산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래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1700년대 중반에서 1700년대 후반까지 생도맹그와 수리남의 커피생산량은 급격한 증가를 보여 줍니다.


#생도맹그 산토스2.jpg


그래프에는 1798년 아이티(Haiti)의 커피생산을 표시하는 흰색 막대가 있습니다. 이 흰색 막대는 1798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현 이이티 공화국)에서 생산된 커피생산량을 표시한 것입니다. 아이티공화국은 180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첫 번째 그래프에 표시되었듯이 당시 생도맹그에서 생산된 커피는 무려 세계 커피생산량의 60%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 그곳에 노예혁명이 발발하며 이 혁명으로 인해 생도맹그의 커피생산은 중단됩니다. 이후 이곳의 커피 노예들은 해방되었으며, 노예해방으로 인해 생도맹그의 플랜테이션은 지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프에 표시된 1820년, 그래프 막대의 녹색부분인 브라질의 커피생산량입니다. 이후 녹색 그래프의 변화처럼 브라질은 생도맹그를 대신해 세계커피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생도맹그 노예혁명 이후, 그곳에서 탈출한 커피생산 숙련자들이 브라질로 모였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노예제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커피 플랜테이션 운영에는 노예노동력이 필수적입니다. 브라질에는 생도맹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대지가 있습니다. 국가 권력과 토호세력의 자본 역시 커피 플랜테이션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커피의 대량 생산을 위한 #플랜테이션 #노예노동과 이러한 시스템을 비호하는 권력과 지원하는 자본이 완벽하게 존재했습니다. 커피의 대량 생산>대량소비의 시대가 이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역사가들은 이러한 구조와 현상을 현대커피역사의 첫 번째 물결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2.프랑스의 커피 욕망: 생도맹그


프랑스의 루이14세(1638-1715)는 지독한 커피애호가였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온실에서 커피를 재배했고 재배한 커피를 직접 로스팅하고 분쇄해 즐겼습니다. 또한 직접 만든 커피로 손님을 대접할 정도로 커피에 열광했습니다. 국왕은 커피생산을 열망해 1670년, 프랑스 남부 디종(Dijon)에서 커피경작을 기획하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네덜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식민지)플랜테이션을 개척한 나라가 프랑스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711년, 일부 수확된 네덜란드의 자바커피는 암스테르담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자바의 성공적인 데뷔였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루이14세는 커피종자를 암스테르담 시장에게 요청했습니다. 시장은 국왕에게 커피씨앗을 보냈고 씨앗은 파리 왕립식물원에 심어져 관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1714년, 암스테르담 시장은 또다시 잘 기른 커피나무 한 그루를 국왕에게 진상했으며 이 커피나무 역시 파리 왕립식물원에서 증식되었습니다.


루이14세는 커피생산을 집요하게 추구했습니다. 이는 결국 인도양의 브루봉(Bourbon),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Martinique)와 생도맹그(Saint-Domingue)에서 실현됩니다. 프랑스가 커피를 생산하려면 다음과 같은 키워드가 핵심입니다. #커피벨트 지역의 식민지, #국가폭력을 대리하는 동인도, 서인도회사 #플랜테이션 #원주민 노동 #노예 노동.


프랑스의 첫 번째 커피 플랜테이션은 현재 레위니옹(Reunion)인 식민지 브루봉 섬에 만들어집니다. 브루봉은 인도양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옆에 위치한 작은 섬입니다. 1700년대초반,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브루봉을 장악할 때 이곳의 원주민은 250명 정도였기 때문에 노예를 수입해야 했습니다. 그런 조건에서도 루이14세는 브루봉에 커피 플랜테이션의 조성을 명령했습니다.


루이14세는 브루봉 플랜테이션을 위한 커피나무를 예멘에서 직접 구하려 노력했습니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커피씨앗과 커피나무의 해외 반출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1715년, 오스만제국은 60그루의 커피나무를 루이14세에게 특별히 분양했습니다. 프랑스는 이 커피나무들을 브루봉으로 직접 공수했습니다. 이 나무들이 브루봉에 도착했을 때에는 겨우 20그루만 살아남았지만 프랑스는 이들 커피나무를 정성껏 살렸습니다. 1718년, 100그루 정도의 묘목을 생산했고, 1720년에는 7,000그루로 증식시켰습니다. 이 커피나무들이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경작되는 버번(Bourbon) 품종의 조상입니다.


브루봉의 커피 플랜테이션은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75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 브루봉의 커피생산은 크게 활성화됩니다. 이곳 커피생산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커피생산을 위한 아프리카 노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브루봉의 노예는 68,645명에서 100,932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 성공하며 1794년, 프랑스 국민공회는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의 폐지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플랜테이션 운영자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노예 없는 플랜테이션은 없습니다. 그런데 17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은 1794년 폐지한 노예 제도를 1802년 다시 복원합니다. 당연히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이를 환영했고 커피노예들의 일상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가 제2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프랑스의 노예제는 결국 폐지됩니다. 100여 년 존속한 브루봉의 커피 플랜테이션은 그곳의 노예해방과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프랑스 커피 생산역사의 가장 큰 성공은 생도맹그(Saint-Domingue)에서 이루어집니다. 1734년, 프랑스는 이곳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50년 후인 1780년, 생도맹그에서 생산된 커피는 50,000(ton), 당시 전 세계 커피소비량의 60%를 차지할 만큼 성장합니다.


생도맹그는 쿠바 동쪽에 있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의 일부분입니다. 1493년부터 스페인 식민지였던 히스파니올라는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입니다. 1625년, 스페인은 섬의 일부를 프랑스에 양도하며 프랑스는 양도받은 섬 일부를 생도맹그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700대 후반 생도맹그는 프랑스 전체 소득의 35%를 창출하는 보석 같은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축적된 기술은 생도맹그의 플랜테이션을 성공시켰습니다. 생도맹그의 기후에 견딜 수 있는 노예의 수입도 적극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생도맹그에서 축적된 노예활용 기술은 중남미 다른 지역의 커피 플랜테이션으로 이전되기도 했습니다. 1798년에 출판된 『생도맹그의 커피농장(The Coffee planter of Saint Domingo)』은 이곳에서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던 피에르 라보리(Pierre Joseph Laborie)가 쓴 책인데 효율적인 노예관리에 대해 기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잔인하고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1798년 자메이카 커피 플랜테이션을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한 매뉴얼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는 이 모든 성공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생도맹그의 커피생산이 정점을 찍은 1791년, 이곳의 노예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791년 반란은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에 고무된 노예들이 주도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인 자유(Liberté), 평등(Egalité), 박애(Fraternité)가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노예들은 고대했습니다. 몇 주 만에 수백 개의 플랜테이션이 파괴되었습니다. 십만 명의 노예들이 이 반란에 참여했습니다. 1792년, 프랑스는 생도맹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1794년,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금지했습니다. 이에 이곳의 주도권은 흑인 반란군이 가지게 되며 프랑스와는 휴전상태로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17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은 1794년 폐지한 노예 제도를 1802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생도맹그 산토스3.jpg


1801년, 나폴레옹은 3만여 명의 원정대를 생도맹그에 파견하여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습니다. 격렬한 저항에 나폴레옹은 실패했습니다. 1804년 1월1일, 생도맹그는 아이티공화국(Republic of Haiti)으로 독립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도맹그 재탈환은 프랑스에게 황금알을 선사하는 보석 같은 식민지 회복의 뜻도 있으나 크게 보면 중남미에서의 정치적 주도권 회복을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1805년,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크게 패했습니다. 이어서 영국은 프랑스의 해상무역을 차단합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를 명령합니다. 영국을 고립시키려는 의도지만 프랑스는 스스로 고립되어 버립니다. 이때 프랑스의 고립은 나폴레옹 체제 유럽의 고립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이티공화국의 탄생, 서인도에서의 주도권 상실, 영국의 프랑스 (식민지)무역차단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는 유럽의 커피 부족을 의미했습니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커피값은 폭등합니다. 커피의 대체품인 치커리커피가 등장한 결정적 이유입니다.


아이티공화국의 탄생은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노예무역, 노예제의 종말을 예고하는 중요한 상징과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유럽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는 아프리카 노예수입과 매매였습니다. 1500년부터 거의 20세기까지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의 모든 국가는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관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인 1천2백만 명이 강제로 노예무역선에 올랐습니다. 아이티의 독립과 함께 노예무역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예제는 1888년까지 이어집니다. 노예제도를 거의 20세기까지 유지한 국가는 브라질입니다. 그들이 노예제도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커피 플랜테이션 운영을 위한 노예 노동력 때문이었습니다.




#3.브라질 산토스


1804년 아이티의 독립은 식민지상태에서 시달리던 이웃 국가들에게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1830년까지, 라틴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지 대부분의 국가들은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때 유럽이 라틴아메리카를 떠나자 그곳의 커피 플랜테이션은 원주민과 해방된 노예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커피 플랜테이션 운영을 위해서는 자본, 기술, 노동력이 필요한데 이들에게는 자본과 기술이 없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신생국가들은 두 가지 대안을 만들어 냅니다. 첫 번째, 플랜테이션을 작게 분할해 원주민과 해방된 노예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이곳에 커피를 심기도 하지만 실생활에 필요한 농작물을 경작해 일상을 유지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지역 토호들에게 커피 플랜테이션을 넘기는데 이들은 대부분 유럽에 협조했던 부역자들입니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럽 시장은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떠오르는 미국시장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입니다. 커피 플랜테이션이 재작동됩니다.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합니다. 커피노예에서 커피노동자로 신분은 바뀌었지만 하는 일은 같았습니다.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노예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잘 기획된 시스템입니다. 비자발적 노예들의 노동력 제고와 효율성을 위해서는 감독, 감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감독, 감시는 주로 원주민 또는 노예 중 선발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악명 높은 갱 시스템(gang system)방식의 집단노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플랜테이션은 작동되지 않습니다. 식민지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은 똑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커피노예와 같은 저임금 커피노동자들을 운영, 관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식민지 시대 이후의 커피 플랜테이션은 그 이전과 변한 것이 없습니다. 라틴아메리카 플랜테이션이 환경, 경제, 사회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1800년대, 미국은 유럽을 대신해 새로운 커피시장으로 떠오르며 세계 최대 커피 소비국이 되었습니다. 1800년대 말에는 전 세계 커피 총량의 40%를 미국이 수입했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변화로 인해 라틴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들은 다양한 모순들을 짊어지고 다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이후 생도맹그의 플랜테이션은 소멸하게 됩니다. 프랑스가 생도맹그를 떠난 후, 그곳의 플랜테이션은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처럼 그곳의 원주민과 노예들이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복합적인 정치적 이유 때문에 모든 판로가 끊깁니다. 주지하듯이 아이티는 아프리카 노예의 반란(혁명)으로 만들어진 공화국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가해 당사자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게 아이티는 역사적인 트라우마입니다. 프랑스와 유럽은 아이티를 멀리했습니다. 미국도 아이티를 멀리했는데 당시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합법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아이티는 정치적 외톨이가 됩니다. 유럽과 미국에게 외면당한다는 것은 글로벌 커피시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이티 커피산업은 물론 그곳 경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티의 경제는 철저하게 붕괴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아이티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전 세계 커피생산량의 60%를 차지하던 아이티의 몰락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커피산업의 기회가 되어 줍니다. 특히 브라질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은 공격적으로 커피 플랜테이션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1800년대, 브라질은 커피 세계최대 생산국이 됩니다. 브라질 커피 플랜테이션 운영자들은 강력한 정치적 블록을 형성합니다. 이들은 커피수출로 큰 부를 축적하며 브라질의 정치경제적 주체로 성장합니다. 브라질 금융 시스템 전체가 커피산업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브라질의 전체 구조는 커피를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동시대 커피공화국 브라질이 탄생합니다.


175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 브라질 전역의 통치권을 넘겨 받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입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1821년,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주앙6세(João VI)는 포르투갈로 돌아가며 왕자를 남겨 두었는데, 남겨진 왕자 페드로I세(Pedro I)는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브라질제국은 농작물 경작을 약속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막대한 장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장려금 지급 조건 중 하나는 충분한 노동력, 곧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라질제국의 장려금은 커피 플랜테이션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스타일의 식민지 커피 플랜테이션이 100년 후 브라질에 다시 등장합니다. 커피노예의 노동력과 자연생태의 착취가 브라질에서 재현됩니다.


본격적인 브라질 커피 플랜테이션은 1817년, 항구도시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근접한 파라이바(Paraíba Valley)에서 시작됩니다. 앞서 말했듯 플랜테이션 운영에는 (1)자본, (2)노동력, (3)기술이 필요합니다. 이곳에는 (1)브라질제국의 자본, (2)아프리카 노예 노동력, (3)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망명한 숙련자의 기술이 있었습니다.


파라비아의 특수성을 반영한 플랜테이션 운영 매뉴얼이 기획됩니다. 이후 이곳에서 만들어진 매뉴얼은 브라질 커피산업의 정체성으로 고착됩니다. 매뉴얼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커피나무를 심기 위해 파라비아의 원시림을 모두 태워버리는 화전방식으로 개간. (2)그늘커피(shade grown)를 지양하고 햇빛에 노출하는 양지커피(sun grown) 경작방식으로 통일. (3)커피나무 식재는 생도맹그 방식인 다이아아몬드 패턴을 지양하고 한 줄로 심어 커피노예 감독을 용이하게 함. (4)커피가공은 생도맹그 방식인 습식(washed)을 지양하고 건식(natural)으로 통일.


#생도맹그 산토스4.jpg


파라이바 플랜테이션의 차별화된 기획, 설계는 성공했습니다. 커피품질과는 상관없이 나무 1,000그루당 평균 1.5톤의 커피를 생산했습니다. 생도맹그 커피 플랜테이션의 생산성과 비교하자면 무려 300% 증가된 것입니다. 커피노예 1인당 연간 1톤의 커피를 생산했으며 이러한 생산성은 생도맹그에 비교해 무려 600% 증가한 것입니다. 1855년, 파라이바 지역에 철도가 건설됩니다. 철도 건설 이전에는 당나귀로 커피를 운송했습니다. 1860년, 브라질의 철도는 223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1885년에는 총 6,930킬로미터로 늘어났습니다. 커피운송과 수출을 위한 브라질의 사회적 간접자본은 계속 확충됩니다. 브라질 커피산업에 예기치 않은 행운이 따릅니다. 1870년, 실론과 자바커피는 커피녹병으로 초토화됩니다. 이제 국제 브라질 커피의 경쟁자는 없습니다. 브라질의 플랜테이션은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질 커피산업의 호황은 노예와 환경의 재앙을 의미했습니다. 노동에 투입된 커피노예의 평균 수명은 7년이며 화전방식의 경작지 개간은 브라질의 원시림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1888년, 플랜테이션 운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노예제는 폐지됩니다. 그렇다고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노예는 노동자로 신분만 변할 뿐입니다. 브라질은 대서양 노예무역이 불법화 되기 전 노예를 가장 많이 수입한 나라였습니다. 불법이 된 후에도 암시장을 통해 노예를 사들인 나라로 유명합니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한 나라입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300여 년에 걸쳐 브라질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는 800만 명이 넘습니다.


1888년, 해방된 노예들은 무려 70만 명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로, 산토스 등 도시로 떠나 버립니다. 플랜테이션은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브라질 커피 생산량은 무려 50% 감소했습니다. 노예 대신 유럽의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이민장려금을 지급하기 시작합니다. 식민지 개척자(colonists)라는 의미의 콜로노(colonos)들은 커피 플랜테이션의 계약 노동자가 되어 노예들을 대신했습니다. 콜로노의 브라질 유입은 19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콜로노들로 노동력문제가 해결되자 브라질 정부는 플랜테이션 확장을 추진합니다. 커피산업에 대한 금융지원, 연구지원 등 다양한 정책이 마련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플랜테이션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단일품종 단일재배입니다. 단일품종 단일재배의 결정적 딜레마는 풍작이면 커피가격이 떨어지고, 흉작이면 수확량이 적은 것입니다. 브라질처럼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주도하는 커피산업은 이러한 위험에 언제나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브라질 내부 상황과 관계없는 국제적인 변동성에 브라질 커피산업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1906년, 커피생산의 과잉으로 인해 국제 커피가격이 폭락합니다.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콜로노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브라질 내부에 큰 사회적 혼란이 야기됩니다. 이때 대부분의 유럽 콜로노들이 농장을 떠났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다른 가난한 국가들에서 콜로노들을 유입시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국가 전체 부의 90%가 커피에 투자된 브라질은 경제 파탄 직전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브라질 정부는 세계은행 대출을 통해 잉여커피를 구매해 창고에 쌓아 두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커피가격은 안정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브라질 정부의 시장개입은 이후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1929년, 미국의 주가 폭락을 계기로 세계는 대공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국제 커피가격은 폭락했습니다. 커피수출에 의존했던 브라질 경제는 또다시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브라질 커피 가격은 대공황 이전 10%에 불과하게 됩니다. 정부의 잉여커피를 구매하는 자금인 세계은행의 대출도 막혀버립니다. 브라질의 커피 플랜테이션은 줄줄이 도산하며 커피산업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커피산업의 재앙은 국가 전체의 혼돈이 됩니다. 이러한 혼돈은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이어집니다. 1931년, 새로운 군사정부는 대책 없이 쌓아둔 창고의 커피를 불태우기로 결정했습니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 13년 동안 브라질 정부가 태운 잉여커피의 총량은 60kg자루 7,820만 개입니다.


#생도맹그 산토스6.jpg
#생도맹그 산토스7.jpg


1939년,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국제 커피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합니다. 브라질은 커피 플랜테이션에 다시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투자하는 플랜테이션은 과거와 같은 시스템,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오래된 관행을 답습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에서 증명되었듯이 플랜테이션이란 효율적 대량 생산은 가능하나 이러한 경제주의에 대한 대가로 #자연생태 파괴 #노동력 착취 #단일경작 #글로벌 변동성에 대한 취약 등 다양한 위기를 동반합니다. 플랜테이션이라는 개념이 식민지 시대의 유물인 것을 현대 브라질 정부는 간과한 것입니다.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커피는 브라질 커피의 정체성이 됩니다. 브라질 커피는 상품커피(commodity coffee)의 원자재로 대량 생산되며 그러한 정체성으로 대랑 소비됩니다. 그러나 커피의 두 번째 물결이 몰려옵니다. 이어서 세 번째 물결이 몰려옵니다. 스페셜티, 지속가능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러한 시대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에 플랜테이션은 마치 공룡처럼 거대하며 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브라질은 세계1위 커피 생산국이며 세계 커피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4.영상


(1)유럽은 왜 아프리카를 노예로 삼았을까?

#유럽의 욕망 #인종차별 #중상주의 #노예무역

Why Did Europeans Enslave Africans?

*영상제작: PBS Origins, *2019, *9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opUDFaqNgXc&t=24s

#생도맹그 산토스8.jpg


(2)어떻게 브라질은 독립국가가 되었었는가?

#브라질 역사 #중세, 현대 역사 #브라질 독립

How did Brazil Become a Country?

*영상제작: Knowledgia, *2023 *12분, *영어(한국어 자동자막 설정 필요)

https://www.youtube.com/watch?v=rqT51lU1IJw

#생도맹그 산토스9.jpg


keyword
이전 02화로부스타: 나쁜 커피의 역사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