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하기 딱 좋아보여서' 관련 글 : https://brunch.co.kr/@freeblue/45)
걸레 사건 이후 서울대 약대 그녀와 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나는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겉으로는 이전과 똑같이 생활을 했다. 분명 같은 6인실 병실 앞에 그녀의 이름표가 끼워져 있는데 내가 처음 입원했을 때 그녀는 낮에는 6인실에서 생활을 하고 밤에는 비어있는 1인실에서 혼자 잠을 잤다. 똑같이 돈을 내는데 그녀만 혼자 편하게 잠을 자는 것이 불평등하다 여겨졌으나, 그것이 같은 병실의 나머지 환자를 배려하기 위함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자 이해되었다.
내가 입원한 지 며칠 지나서 조울증 남자와 함께 이곳이 어딘지 모르는 60대 남성이 입원했다. 특별히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해 보이던 60대 남성은 입원한 다음 날 밤부터 서울대 약대 그녀가 주인이던 1인실의 새 주인이 되었다.
입원 첫날 그는 6인실 남자 병실에서 자는 동안 소리를 많이 질렀다고 한다.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들었던 나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지만 같은 병실에 있던 남자들은 많이 불편했었던 모양이다.
공짜 1인실 독방을 뺏겨서 인지, 자신의 멀쩡함을 드러내고 싶어서인지 밤잠을 자주 설치던 서울대 약대 그녀는 60대 남자가 밤에 소리를 질렀다는 것에 한 마디 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런데. 어제 어찌나 소란스럽던지.”
순수(서울대 약대 그녀)님도 처음에 그러셨다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퇴원을 결정하고 준비할 때쯤 서울대 약대 그녀는 공기 중에 혼잣말을 했다.
“이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선생님은 왜 나를 퇴원을 안 시켜주시는지 모르겠네~.”
같은 병실에 입원한 내 주제임에도, 안타깝고 죄송하게도 선생님과 간호사와 나는 그 이유를 알 거 같은데 그녀는 모르는 (척하는)것 같았다.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꾸만 거슬리고 짜증이 나는 걸 보니 ‘내가 퇴원을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가 며칠 만에 극도로 호전되어서 퇴원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열흘 만에 우울증이 나을 수는 없다. 직장생활과 아이양육이라는, 그 와중에 당시엔 쓸모없을 의무감이 퇴원이라는 성급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첫 경험(정신과 퇴원)은 서툴기 마련이다...
퇴원 날 아침, 짐을 돌려받고 환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원 안내문과 약을 받고 퇴원을 준비하였다. 간호사가 건네준 퇴원안내문에 적힌 나의 퇴원상태는 이랬다.
- 의식상태 : 명료
- 이송요구 : 스스로 이동
- 퇴원방법 : 도보
- 환자상태 : 안정
- 퇴원형태 : 정상퇴원
일주일을 예상했던 입원 기간 동안 나에게 맞는 약을 찾지 못해 입원 기간이 열흘로 늘어났다. 결코 완벽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잠을 자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퇴원을 결정했다. 다니던 직장에도 눈치가 보였고 학기 중인 아이를 장기간 체험학습으로 돌려놓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퇴원 날까지 몸에 맞는 약을 정확히 맞추진 못했지만 아주 불편한 수준은 아닌 상태에서 퇴원을 하게 되었다. 몸에 맞는 약을 찾느라, 입원 중에 이 약이 안 맞으면 저 약으로 저 약이 용량이 많으면 줄이는 방법으로 이리저리 바꿔가며 약을 먹었더니 입원 기간 동안 더 불편하기도 했고 멍하기도 했다.
퇴원하는 날 아침 내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흐릿했는데, 퇴원안내문에 적힌 내 의식상태는 ‘명료’했다.
혼자 입원비를 결제하고, 짐을 챙기고, 간호사에게 약을 건네받고, 짐 가방을 들고 병원을 빠져나왔으니 ‘명료’ 한 걸로 할까?
내가 퇴원하기 전까지 퇴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울대 약대 그녀는 조금 더 있으면 퇴원을 할 것 같았고, 조울증으로 입원한 그는 내가 퇴원할 때까지도 조증 상태였지만 그 또한 약을 맞추기 위해 제 발로 입원했으므로 호전되어 퇴원할 것이다. 모두가 건강해져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신혼여행보다 길었던 9박 10일간의 입원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정신건강의학과 보호 병동(폐쇄 병동) 입원은 처음이라, 볼펜이 압수당할 줄 몰랐다. 전화 통화 할 때 메모를 해야 하는데 펜도 종이도 없어 간호사에게 손바닥 만한 종이 한 장과 펜을 잠시 빌렸었다. 연필꽂이통에 여러 개 꽂혀있는 컴퓨터용 사인펜 중 하나를 건네주던 간호사가 말했다.
“펜은 본인이 가져오셔야 해요.”
'연필꽂이에 이전 환자들이 버리고 간 색깔 다 빠진 컴퓨터용 사인펜이 꽉 차있는데 그거 좀 쓰면 어때서...'
‘다음엔 컴퓨터용 사인펜을 다섯 통 정도 준비해서 와야지.’
그냥 혼자 우스개 생각을 한 거였는데 정말 컴퓨터용 사인펜을 준비하게 될지 그땐 몰랐다.
< 입원 후 경과 >
환자는 19XX년 OO에서 X남 X녀 중 X째로 태어났다고 하며, 무뚝뚝한 부모 슬하에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게 성장하였다고 함. (중략)
우울감, 무기력감, 불면 심화되고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 등을 반추하며 생활 전반에 있어 활력 수준 현저히 저하되었다고 함. 20XX년 X월 본원 외래 진료 재개하면서 약물 투약하였으나, 불안감, 호흡곤란 지속되며 tDCS에도 치료반응 호전 보이지 않았다고 함. 환자 우울, 불안, 호흡곤란 등 신체증상에 대해 본과적 약제 조절 희망하여 외래 통해 보호병동 자의입원 조치됨. 환자는 입원 후 수면 조절 위해 XX 등 항불안제 조절받았으며, 기분 저하 및 무기력에 대해 XX 추가하여 투약받았음. 이후 기분증상 호전 보이고 퇴원 후 생활에 대한 자신감 보여 퇴원 조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