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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Oct 12. 2024

정신과 퇴원 그 후 - 당직

퇴원을 하고 직장에 나가자마자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다.

입원 등의 이유로 두 번이나 미뤄진 당직을 해야 했다. 바뀐 당직 날짜는 연휴였다. 연휴가 달갑지 않을 일부 직원에겐 당직을 핑계로 집안대소사를 피할 수 있는 정당한 기회의 장이 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연휴 중 당직을 기피했다. 


몸 상태로 보아 당직을 미루고 싶었으나, 연휴 중에 끼어있는 당직이라 누군가와 다시 바꾸기도 애매했다. 연휴에 당직을 하는 건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정신과에서 갓 퇴원한 내 몸이 하루종일 건물을 지킬 힘이 없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 되었다. 퇴원 후부터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당직 전날 제대로 못 잔 몸을 일으켜 좀비처럼 당직실에 가서 전날 밤에 숙직*을 한 남직원과 교대를 했다. 

[* 주말과 공휴일 오전 9시~18시 당직은 일직으로, 성별 상관없이 직원 1명이 남성 방호원 1명과 같이 당직을 섰다. * 매일 18시~다음날 오전 9시까지 하는 당직은 숙직으로, 남성 방호원 1명과 함께 남직원 1명이 당직을 섰다. * 휴일이 아닌 평일 오전 9시~18시까지는 별도의 당직자 없이 남성 방호원 혼자 근무했다. 

* 여직원 증가로 남직원들의 숙직이 자주 돌아오는 문제가 있어 여직원도 밤 숙직을 하기로 결정되어 남자 방호원과 성별이 다른, 여직원용 숙직실을 만든다는 얘기가 나왔다.] 


오자마자 해야 할 건 상위기관에서 내려온 임무를 하위기관에 알리고 상위기관에 다시 당직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당직 첫 의무를 이행하고 나서 의자에 앉아 기관에 특이 사항이 없는지 나라에 전쟁이라도 터지지 않는지(?) 매의 눈빛(?)으로 당직에 임하려고 했으나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잠이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앉아있는데도 저릿저릿한 온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시체가 의자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했던 데로 민원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기관 특성상 당직보고 외에 연휴에 당직실로 걸려올 전화가 한 가지 있었다. 미리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전화가 많이 왔다. 

시체역할이 끝나고 좀비역할이 시작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시체는 전화벨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목소리에 힘을 빳빳이 넣고선 "안녕하십니까 OOOO 당직실 누구누구입니다."로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을 민원인이 물었다. 하루 24시간, 연중무휴로 근무하는 관련부서로 전화를 연결하고, 전화가 끊어질 경우를 대비해 해당부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보통 주말에 당직할 때 민원전화가 걸려오기는 하나 몇 통 정도만 올 뿐이었다. 당직을 할 때는 이상하게도 그 몇 통의 전화도 너무 귀찮게 느껴진다. 연휴인 지금,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같은 질문의 전화가 계속 이어지니 늘어졌던 몸이 순간순간 긴장하게 되었다. 친절은 고사하고 민원인에게 내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억지로 힘을 내 전화를 받아 관련부서로 전화를 계속 연결해 주는 단순한 일도 그날 나에겐 힘들었다.


당직실엔 출입자관리나 경비업무를 맡는 방호원이 교대근무를 하며 상주한다. 같은 공무원인 방호원이 있는데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왜 당직을 서야 하는지 아직도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는 무식한 공무원이다. 방호원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어 일반직들이 당직을 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으나 방호원이나 일반직이나 같은 공무원인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게 정말 이유인지 명확하게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신규교육 때도 시보기간에도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이 되어서도 당직을 하는 이유를 들어본 적 없고 나 또한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당직날짜가 정해지면 당직을 섰다. 처음 직장에 들어왔을 때 방호원이 있는데 왜 당직을 서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이제 내게 그런 의문은 없어졌다. 문제의식을 가지는 순간 피곤해진다.


즉, 상하위 기관에 당직보고를 하고, 당직명부에 내용을 기재하고, 민원전화를 계속 받고 있을 때 내 뒤의 책상 의자에 방호원도 계속 같이 상주하고 있었다. 가끔 순찰을 다녀오겠다고 건물 주변을 둘러보고 오시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 즈음, 뒤에 앉아 계신 방호원께서 "전화 착신해 놓고 점심 먹고 잠시 쉬었다 오라"고 말을 하면 당직전화를 내 휴대폰으로 착신전환한 채로 건물 내 어디선가 밥을 먹고 왔었다. '그 시간 동안 민원전화를 대신 받아주면 안 되나'라고 생각한 적은 있으나 방호원은 분명히 나에게 전화를 착신해 놓고 점심 먹고 오라고 했다. 


당직실 컴퓨터와 책상에 이런저런 부서번호와 주요한 내용이 붙어있어서 나도 그걸 보고 전화를 연결해 주고 그때그때 대응을 한다. 평소 주말 당직의 경우 점심때 당직실로 전화 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착신전환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연휴였던 그날은 민원인들의 공통된 한 가지 궁금점 때문에 수시로 전화가 걸려와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방호원이 나에게 점심을 먹고 오라고 했으나 내 휴대폰으로 당직전화를 착신전환 해 놓아도 다른 부서로 전화를 돌려줄 수가 없어 문제였다. 아니면 해당부서 전화번호 여러 개를 메모해 놓았다가 그 번호를 알려주거나 해야 했는데 그럴 바엔 그냥 그 자리에서 대충 점심을 때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방호원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어 준비해 온 샤인머스켓을 한 송이씩 뜯어먹었다. 그 자리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건 결과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샤인머스켓을 하나씩 뜯어먹고 있을 때 몇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책상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를 통해 손쉽게 관련부서로 연결해 줄 수 있었다.


쓰러지고 싶은 몸 상태였으나 민원전화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쓰러지지 않고 그날 당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고 미뤄뒀던 당직숙제를 끝낼 수 있어서 후련했다. 몇 달 후 당직순서가 다시 올 것이었으나 다음 당직 순서가 오기도 전에 결국 중증의 우울증으로 휴직을 하게 되어 당직숙제는 당분간 보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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