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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 가는 한국전쟁 군경 미망인

<4>

by 디딤돌 Feb 11. 2024

  

( 경찰충혼탑 전면에서 바라본 현충원 전경 /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은 서초구 반포 일대다 )


   필자는 동작동 현충원 근처에 거주하는 관계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바람을 쏘일 겸 산책을 한다. 혹시 이곳을 방문한 경험이 없다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들러보길 권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을 모신 성지이고 한편으론 사계절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하다.     


( 봄이면 산수유 목련등이 만개한다 / 왕벚꽃이 피어있는 모습 )


( 단풍이 시작되면 은행잎이 제일 먼저 가을 소식을 알린다 )


  기본적인 공공예절만 지킨다면 누구라도 시설을 둘러보고 추모도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독립유공자와 월남전 전사자를 비롯하여 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장병들이 모셔져 있다. 사병 묘역을 둘러보면 후손이 없어 세월만큼이나 닳은 비석이 있는가 하면 최근 새롭게 설치된 경우도 볼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미망인 신분이었다가 여생을 마치면서 남편과 합장된 경우가 많다.    

 

( 사병묘역에 있는 참전용사와 미망인의 합장 묘비 / 전면 )


(  남편은 27세에 전사하였고 미망인은 당시 20세였다. 그 후 69년 동안 부군 없이 지내다가 8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 후면)


  대형버스가 장례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수시로 원내를 드나든다. 어림잡아 계산하면 미망인의 평균 연세가 90세 전후이다. 한 많은 생애를 마치고 남편 곁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 걸음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한국전쟁미망인 중 <군경 미망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에 관해 살펴보겠다.   


(  참전용사는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품에 안기셨고 미망인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다가 천상재회를 위해 남편을 만나러 가시는 길 입구다)


( 봉안식장에서 장례 절차를 마친 후 충혼당시설로 자리를 옮겨 영면에 들어가신다  )

  미망인이란 말은 원래 남편을 잃은 여자가 스스로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중국 고대국가인 초나라 때 나온 말이라 하는데 사어(死語)가 되지 않고 지금까지 통용되는 게 흥미롭다. 과부나 홀어미란 표현보다는 나아서일까? 요즘 이슈인 성차별적 용어의 정의와는 조금 달라 보인다. 현재도 <대한민국 전몰군경 미망인회> 란 단체가 활동하는 중이다.

    

  전문성을 가지고 직접 당사자를 면담한 후 객관적인 글을 쓰는 게 바람직하지만 나의 입장에선 현실적인 제약이 있어 국립중앙도서관에 들러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란 책을 읽고, 여기에 참고 자료를 추가 검색 한 후 정리하여 가급적 기록된 사실에 근거하되 필자의 생각을 추가했다.

   

  주인공 대부분은 일제의 징용이나 정신대 차출을 피하여 16세 내지 17세쯤 결혼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무렵에는 겨우 20세 초반이었을 걸로 추정된다. 지금 생각으로는 남편이 군에 입대하기 전 부부가 애처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작별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온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생이별을 했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부군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남편 사후 자녀가 없었다면 운신의 폭이 조금은 넓지 않았을까 추정되지만 자식을 두고 있는 경우는 인간적인 고뇌가 컸을 것이다. 자녀를 시댁에 맡기고 몸만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친정으로 복귀하는 일도 여의치 않고 지금처럼 취업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더구나 재혼은 자녀의 친권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부는 피난 도중 시댁으로부터 버림받아 자식과 함께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종전 후 모자원(母子院)이란 시설이 생겨 일부 갈 곳 없는 미망인과 어린 자녀들이 임시거처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시댁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젊디 젊은 나이에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그들의 삶이 파란만장했으리란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순종하는 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대부분 모질게 굴었고 야반도주 또는 바람피울까 봐 감시를 했다.   

  

  간혹 분가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싸움이 불가피했고 남편의 사망보상금이나 상속 권리도 시댁에서 가져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증언한다. 농촌지역은 분가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고 그나마 도회지 근방의 경우는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는 길이 열렸고 삯바느질 수요도 있어 자식과 함께 시댁으로부터 독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시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된 여성을 업신여기는 편견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만 했다.    


  미망인들이 이룬 가족은 그야말로 “나와 내 새끼”였다. 주위의 불편한 시선도 잠재우고 한곳에 집중할 곳이 있어야 했는데 가장 안전한 전략은 일과 "자식교육"이었다. 아버지의 부재에 따라 쏠리는 편견(아비 없는 자식이란 인식)을 없애기 위해 엄한 엄마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같이 울어야 했다. 심지어 홀로 키워 장성한 아들이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편과 자식을 전쟁으로 잃은 최악의 경우다.  미망인 자식의 파병은 국가의 배려가 없는 처사란 생각이 든다.   

   

  전쟁 발발 직전이나 유복자로 태어난 자녀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버지가 등목을 시켜주는 친구를 보고 나는 진한 아쉬움이 있었어요"라는 증언도 있다. 부친의 체취를 느껴본 적이 없어 한이 된다고 말하는 자식도 있고 더러는 아예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어떤 존재감도 느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평생 아물 수 없는 큰 상처임에는 틀림없다.  

   

  당시 미망인들을 바라보는 사회시선은 어땠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유교적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선시대에 열녀를 칭송했던 것처럼 수절이 숭고한 것인 양 은근히 압박했다. 심지어 재가를 하면 자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법까지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도 옴짝달싹 할 수 없었고 국가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그들을 얽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병자호란(1636년)이 있은 후 청나라로 끌려갔던 조선 여성(환향녀)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일이 있다. 조정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기에 이들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거두길 요청했지만 양반가문을 중심으로 심한 냉대를 했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국방을 책임져야 할 남자들이 무능하여 변을 당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애먼 여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행위는 아무리 유교사회라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백 년 전의 일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까지 의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미망인 중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면 <장한 어머니 상>을 시상했는데  외형적으로는 대단해 보였겠지만 인간 개인으로서의 꿈과 욕정을 꽁꽁 틀어막는 족쇄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겉모습에 대한 규제도 있었는데 이때부터 일본에서 유입된 <몸뻬>라는 바지를 착용하도록 권고했다. 일에만 집중하라는 것이고 여성으로서의 멋과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전부 거두어 갔다고 본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일도 빈발했다. 부잣집에 식모살이를 가거나 창부로 전락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은 싸늘했다. "남편의 부재로 인한 가정파괴는 선천적으로 음탕한 여성이 타락하여 벌어지는 일쯤으로 치부했다." 아무리 곤궁해도 품행이 방정한 여성은 그런 일을 아예 일으키지 않는다는 억지논리였을 것이다.

    

  그들이 경제 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은 공장노동자(군사원호 대상자 고용 법에 의거 주로 취업)가 되거나 장사, 삯바느질이었다. 이때 계(契)가 성행했는데 미망인을 비롯하여 여성들에게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교류의 중요한 장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계 바람, 치맛바람, 춤바람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 같은 현상은 도시지역에 한정된 일이고 농촌지역 미망인들에게는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2년 후(1955년)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은 <미망인(The Widow)>이란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 홍보 문구가 이렇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 모성 이전에 고독과 삶의 욕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수절과 욕정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갈등을 영화화한 것이다. 여성이 여성을 가장 잘 알기에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주위의 시선 때문에 무성애자(無性愛者)로 살아야 했다.


  국가로부터 제일 우선하여 보호받아야 할 주체들이 "단순한 동정대상이거나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주변인" 정도로 바라본 국가와 주위의 태도가 놀랍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 치유는 고사하고 차별과 감시 속에서 기나긴 세월을 숨죽이며 살아가도록 유도했다.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글이 있어 인용한다. "이타주의 뒤에는 이기주의가, 복종의 밑에는 반항심이, 순결의 마음 아래에는 성적 욕구가 숨어 있다." 일종의 양가감정이 누구에게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며칠 전 신문기사에 난 내용이다. 전사자 유해가 발굴되고 신원이 확인된 참전 경찰관 이야기다. 미망인은 몇 해 전 떠나고 딸이 대신 유해 안장 절차를 마쳤는데 생전 어머니께서 남편이 그리워 <연락선은 떠난다>라는 노래를 그토록 자주 불렀다 한다. 자신의 삶이 이토록 모질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회한이 아니었을까? 유해발굴단의 작업현장 주변에서 배회하는 어느 미망인의 TV에 비친 모습을 보노라니 애달프기 그지없다.   

 

  이미 작고한 어느 미망인은 전사한 남편 시신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언젠가는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의 밥을 항상 준비하여 아랫목 따뜻한 곳에 두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숙연한 마음이 든다. 남편은 20대 혈기 왕성한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부인은 이별 후 평생에 걸쳐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사자들에겐 얼마나 커다란 비극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더 슬픈 것은 피해자의 아픔을 보듬어낼 낼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의 일이 아니면 관심도 없고 쉽게 잊는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전쟁 중에 혼자된 여성이 많지만 냉대와 감시 속에 처절하게 살아온 미망인들도 있다. 바로 피학살자(대부분 무지에 기반 한 이념 희생자)의 부인들이다. 보호는커녕 연좌제로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한은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남편이 군속, 종군자, 징용 신분인 상태에서 지원업무를 수행하다가 전사한 경우도 있으며 상이군경과 결혼한 여성(대부분 1935년 전후 출생한 여성)들의 지난한 삶도 잊지 말아야 한다.

    

(  한국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조명은 상대적으로 많지만 정작 드러나지 않은 영웅들이 있다.  전투장비를 수송했던 징용자의 희생에 대해선 미망인처럼 국민의 관심에서 멀리 있었다 )


  대북 강경파들이 전쟁불사, 선제타격을 쉽게 말하는데 무책임한 발언들이다. 침략에 대해서는 당연히 강력한 응징을 해야 하겠지만 불안감을 조성해 무언가를 얻겠다는 목적으로 그런 발언을 하면 곤란하다. 설사 전쟁 후 최종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남은 건 잿더미와 수많은 군인들의 주검과 미망인들이 대량으로 다시 생겨난다면 이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 생존해 있는 미망인을 최대로 예우하였으면 한다. 사후에 현충원에서 예포를 쏘며 엄숙한 장례절차를 치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모시고 아픔을 위로해 주는 게 중요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은 주변인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생존해 계신 모든 전쟁미망인들의 마지막 시간은 따뜻하고 한을 삭이는 여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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