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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수채화 빛, 첫사랑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by 방현일

따사로운 5월의 햇살을 받으며 학교로 가던 중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까치발로 담장을 넘겨보려 했으나, 여의찮아 조심스레 파란 대문을 열어 보았다. 그네에서 발장난을 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를 본 순간, 난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풀려 벽에 기대었다. 나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우리는 다른 반이었지만 집이 같은 방향이다 보니 오가면서 자주 보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전교생이 연극 공연을 가게 되었는데 누나와 그 아이의 언니가 친구 사이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나, 현정이야.”


보기완 달리 그 아인 터프했고 오히려 내가 더 쑥스러움을 탔다. 어린이 회관에서 공연을 보고 어린이대공원에서 우린 재밌는 놀이기구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한결 가까워졌다. 현정이 집엔 삐거덕거리는 낡은 그네와 빛바랜 피아노가 있었다. 난 3학년에 올라갈 때 현정이와 같은 반이 되기를 바랐다. 고대했던 여름 방학이 왔다. 현정이와 무엇을 할까? 고민했었고 현정이 언니와 누나와 넷이 인근 수영장엘 갔다. 그날, 푸른 하늘과 파란 물빛은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사랑스러운 현정이의 웃음으로 파도가 되어 왔다. 어떻게 하면 현정이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아도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고민만 하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수업하는 내내 현정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난 교과서 뒷장에 현정이의 이름을 적으며 ‘사랑해’라는 글자로 꽉 채웠다.




유난히 햇살이 좋은 날, 교문 앞에서 난 현정이를 기다렸고 현정이는 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질 않았다. 집으로 가던 중, 현정이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댔다. 들어가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질 않았다. 현정이는 다음날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내심 걱정이 되었고 혹시 전학을 갔나 싶어 누나에게 물어보니, 그런 일이 없다고 해서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도 현정이는 다음날 학교에 나왔고 집으로 오면서 파란 대문을 지나갈 무렵 나를 불렀다.


“야, 나 며칠 학교에 못 나와서 필기를 못 했는데 국어 교과서 좀 빌려줄래? 내일 아침에 갖다 줄 게.”


장난을 치면서 줄 수도 있었고 또 왜 안 나왔었는지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난 그냥 책가방에서 국어 교과서를 꺼내 주고 뒤도 안 돌아본 채 빠른 걸음으로 집에 왔다. 책상에 앉아 가슴을 진정시키고 붉어진 얼굴에 연신 부채를 흔들어 댔다. 그리고 저녁때가 돼서야 내가 국어 교과서 뒷장에 현정이의 이름과 ‘사랑해’라는 글자를 빼곡히 채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정이가 봤을까?”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방안을 서성이며 지금이라도 가서 교과서를 다시 가져올까?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한편으론 오히려 잘 됐다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역시 잠이 오질 않았다. 거의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고 혹시나 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파란 대문 집을 지나갔다. 평소보다 교실에 일찍 온 나는 창문 아래쪽으로 현정이가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난 내 자리로 가서 교과서를 펴 들고 예습하는 척했다. 현정이는 우리 반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시간이 내겐 너무 멀게 느껴졌다. 잘될 거야, 하며 그 아이가 교과서를 내게 주면 난 사귀자고 말할 참이었다.


“너나 좋아하니, 근데 어쩌지? 난 공부 못하는 애는 싫거든.”


이게 뭔 말인가, 그 아인 총총히 내 앞에서 사라졌으며 난 그제야 깨달았다.


“아차차, 성적표!”


난 1학기 성적표를 국어 교과서에 꽂아 두었던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후회와 실망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난 한동안 그 아이 집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늘 다니던 지름길을 포기하고 에움길로 다녔다. 그리고 3학년에 올라가서 같은 반이 되었다. 예전엔 그렇게 고대했었는데 이젠 오히려 부담되었다. 난 애면글면 공부만 했다. 그 아이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스스로 다짐을 했고 2학기 때 그 아이가 부반장을 내가 반장을 하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 아이의 소식을 누나한테서 듣게 되었다. 이젠 아름답고 성숙한, 아니 완숙한 그녀가 되어있겠지, 그랬다.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고 했으며 한 남자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5월 햇살의 따사로움과 푸른 하늘이 나의 가슴을 두드린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 틈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Image by Hello Cdd20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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