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해봐도 좋겠다의 언젠가는 언제인가?
여행은 떠나기로 정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 말을 참 좋아한다.
스무 살 대학생이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땐 집을 나가 살고, 해외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할 때라 그 마음이 더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친척들을 따라다닌 패키지여행을 시작으로
스무 살이 되고선 해외 근무에 잠시 나간 삼촌네 얹혀 미국 패키지를 다녀왔고
스물한 살에 친구들과 첫 유럽 여행, 이듬해 가족끼리 유럽 여행, 그리고 일본 여행을 여러 번 다녀왔다.
내 대학 시절 모은 아르바이트비는 고스란히 여행에 쓰였다고 해도 좋았다.
특히 내가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던 부분은 여행 일정을 짜는 것이었다.
마치 라떼시절 이야기 같지만, 고작 1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여행의 정보가 넘실대던 시절이 아니었다.
유튜브 시장이 지금처럼 크지도 않았거니와 여행 책자가 가장 보편적이던 시기였다.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상품이 가장 흔한 선택지였으며, 자유여행에 드는 품은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들 때였다.
페이스북 유디니에서 정보를 뒤져보는 것이 최선이었고, 네이버 카페를 정독하는 것이 여행 전 필수 일과였다.
트리플 같은 편리한 앱도 없었기에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위시빈 웹사이트로 동선을 일일이 확인했다.
또, 구글맵에 하나하나 별을 찍어가며 위치와 리뷰를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나라에 가진 않았지만 갔던 곳을 여러 번 다니며 여행 일정 짜는 실력은 일취월장해갔다.
특히 그 옛날 구글맵에 북마크 해둔 맛집들이 아직도 릴스에 맛집으로 소개되는 것을 볼 때면
그 시절, 내가 없는 땅에서 참 열심히도 정보를 끌어모았구나 싶기도 했다.
오죽하면 너무 많은 책을 읽어서 아직 가보지 않은 곳도 머릿속에 지도가 훤히 그려질 정도였으니.
심할 때에는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 벅차오르는 풍경을 마주하고도 '이거 내가 처음 보는 게 맞나?' 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첫 감동을 여러 번 빼앗겼을 정도로, 여행 일정을 짤 때 나는 미친 듯이 몰입하곤 했다.
'너 이거 정말 잘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 그 일이 바로 당신의 재능이라고들 한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몇 번 있었으며, 그중 하나는 단연 여행 일정을 짤 때였다.
지도를 보고 검색하고 후기들을 읽으면 대강 실제 도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숙소의 퀄리티가 소개된 만큼인지 직접 가보지 않고도 적중률 90%를 넘길 수 있을 때 즈음이었다.
"넌 진짜 나중에 이걸로 돈 벌어라."
여행을 같이 가기로 한 친구들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하던 말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여행 관련 산업에 취업해 보라는 의미였고, 일부는 퍼스널 플래너를 해보란 뜻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 시절 자유여행은 참으로 수고스럽고도 귀찮은 일이었다.
여행 서류 준비 자체도 지금보다 번거로울 시절이었으며 그저 모든 것이 덜 편리한 세상이었다.
"진짜? 나 나중에 프라이빗 서비스 이런 걸로 돈 벌어볼까?"
깔깔대며 한, 여행 준비 중의 기분 좋은 대화였던 그 말들은 '정말 해볼까?' 하는 작은 고민으로 묻어둔 사이
세상이 편리해지고 정보가 범람하며 잊혀 갔다.
수많은 여행 계정 덕에 누구나 여행 정보를 얻기 쉬워졌고, 블로그가 더욱 성행하며 후기들도 다채로워졌으며, 여행 준비를 도와주는 여러 가지 어플 덕분에 이 모든 걸 관리하는 것도 훨씬 덜 귀찮아졌다.
여행사가 대부분의 파이를 차지하던 시장에서 여행사와 자유여행 서포트 기업으로 파이가 나뉘었을 뿐
딱히 그 사이에 '여행 일정을 짜주는 개인'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애초에, 단가가 그리 높지 않은 시장에 비집고 들어갈 틈을 고민할 이유는 크게 없었다.
그냥 나 여행 다니고, 남 여행 다닐 때 도와줄 수 있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능숙한 재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프로크리에이트 챌린지를 고민만 하고 있을 때였다.
그즈음 '프로그램 빚기 챌린지'(이하 프빚챌)에 참가했다.
디지털 노마드 겸 코치로 일하시는 모모(@momo.snaillife)님이 열었던 하이아웃풋클럽 챌린지로,
각자 아이디어로 품고만 있던 것을 실제로 기획하여 작고 빠르게 론칭해 보자는 것이 목표였다.
내가 들고 간 아이디어는 여행 맞춤일정 서비스였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프로크리에이트 챌린지도 여기서 동력을 얻어 먼저 추진하긴 했지만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여행일정 서비스'였다.
아마도 그 무렵의 나는 여행 블로그를 키우려 열심히 포스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이리얼트립 마케팅 파트너 활동을 하면서 후쿠오카 맛집 후기들을 부지런히 올릴 때였다.
실제로 후쿠오카만 다섯 번을 다녀온지라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행일정 서비스도 좁게 시작하기 위해 '후쿠오카 맞춤 일정 서비스'로 잡았다.
다만 정보를 많이 알고 있고 여행을 많이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프빚챌에 참여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할지, 나는 이 서비스를 어떤 형태로 제공해야 할지. 구체화가 필요했다.
'그냥 일정 잘 짜니까 어떻게든 서비스하면 되지.'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프빚챌 참여 전, 친구 두 명의 일본 여행 일정 짜는 것을 도와주며 나름의 일정표 양식을 만들었었다.
당시 인지하진 못했지만 일종의 베타 테스트였겠지.
내가 만든 양식표가 보기 좋은지, 일정은 만족스러운지, 어떤 점이 더 필요한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동시에 '어떤 질문을 해야 의뢰인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기도 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프빚챌에서 더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누가 자유여행을 위한 일정 의뢰 서비스를 이용할 것인가? 상세 페이지에서 어떤 점을 더 강조해야 하는가?
고객 관점에서의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구체적인 타깃을 정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예약이 귀찮은 곳을 다닐 때면 너무 막막해진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계획을 잘 짜던 사람들조차도 부모님과 떠나는 여행은 차원이 다른 것이라 말했다.
패키지는 너무 빡빡해서 싫다고 하는 가족과 여행을 떠나게 되면 자신이 적당한 자유여행을 기획해야 하고
그 모든 총대를 메야해서 너무 힘들다 말했다.
또 누군가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타입이라 일정을 세우는 것이 지나치게 수고스럽게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갔다가 현지에서 너무 고생하거나 금전적 손해를 본 적도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계획과 사전조사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 귀찮음을 누군가 대신해 준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 이런 포인트구나! 서비스에 필요한 항목들과 판매 페이지에 내용들을 하나 둘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프빚챌 참여자 중 한 분이 어떤 사이트를 소개해주었다.
트래블마켓이라는, 자유여행 일정을 대신 짜주는 전문가를 모은다는 사이트였다.
'여기 크몽에서 여행일정 짜는 사람들만 모아서 만든 사이트던데, 이제 막 만들어졌나 봐요. 한 번 봐봐요.'
딱 내가 생각하던 포지션. 자유여행은 떠나고 싶지만 그 과정이 수고스럽고 어려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한 여행 일정 플래닝 전문가를 모아두었다는 사이트였다.
크몽에 검색했을 때에도 여행 일정 서비스가 많지 않기에 여기 올려봐야겠다 했었는데
뭔가 상대적으로 작은 사이트여서였을까? 덜 부담스럽게 느껴져 빠르게 신청서를 넣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총 38건의 서비스를 판매했으며 약 140만 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수수료를 포함한 매출은 더 큰 금액이지만 일종의 마케팅 비용이라 생각하고 순수익만 따지면 이 정도.
대단한 돈은 못 되어도 백수시절 나에게 용돈정도는 충분히 되어주었다.
단순히 돈 이외에도, 실제로 서비스를 진행하면서 역시 상상과 실제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객들은 내 예상보다 다채로웠고, 요구사항은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해달라고 찾아온 것이라
기차로 2시간 넘는 거리를 당일치기로 갈 수 있는지 문의하기도 했고
한 달 전부터 이미 매진되곤 하는 티켓 예매 없이 그 일정을 꼭 넣어달라 부탁하는 분들도 계셨다.
내가 미리 대비하고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고객들과 요구사항은 실제와 퍽 달랐다.
그 점이 막막하기도 하고, 재미있을 때도 있었다.
'역시 해봐야 아는 거구나.'
프로크리에이트 챌린지 때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일정표 양식은 고객이 실제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피드백이 있었다며
사이트 자체 양식으로 교체되기도 했고, 채팅 방식도 여러 번 바뀌기도 했다.
모든 것이 시행착오였다. 나뿐 아니라 플랫폼 사이트 측도 그랬다.
특히 서비스 초기부터 함께 했다 보니 카카오톡에서 자체 앱으로 서비스가 바뀌는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며
매뉴얼에 나의 상담 사례가 우수 예시로 뽑히기도 하고, 오류에 대한 피드백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초창기에만 가능한 경험들이라는 점에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현 직장에 취업한 이후로는 여러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었지만
막연히 꿈만 꾸던 것을 실제 서비스로 만들어 돈을 벌어보는 경험은 아무나 하기 쉽지 않고,
그래서 더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여행을 통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한때는 대단한 기획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 일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고, 나에겐 첫 수익이 되었으며,
결국 내가 스스로를 조금은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나 스스로만이 아니라, 회사 밖에서 온전히 돈 만원 벌어보는 경험은 내가 세상을 달리 보게 해 주었다.
결국 ‘이걸로 돈이 될까?’로 시작한 것이 아닌 ‘한 번 해보자’로 옮긴 그 발걸음이,
어쩌면 나의 삶에 찾아온 작고도 선명한 스몰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작은 변화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는, 다음 글에 이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