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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Apr 23. 2024

항공권 구입이란

옛날 사람의 자유여행

비행기표 다섯 장을 끊었다. 여행일로부터 무려 293일 전이었고 내 실행력에 자부했다. 다섯 명은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달랐지만 그날부터 항공권에 맞추어 살게 될 것이었다. 직장의 일처리는 당연하고 용돈도 미리부터 바짝 줄여 쓰고 정보도 꼼꼼히 잘 정리해야 한다.

즐거운 여행을 위해 항공권을 미리 구입하는 건 자유여행의 첫 단계였다. 사실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자유여행으로만 해외에 갔다. 수십 번 장기 해외 출장과 거주를 경험한 지인이 만날 때마다 자유여행의 묘미를 강조함으로써 내 로망을 부채질했다. 덕분에 나의 해외여행 루틴은 항공권 구입부터 시작되어 실제 여행을 마치는 날까지의 모든 과정을 온전히 즐겼다.

그 로망을 아름답게 이루어 내고, 오랫동안 추억하기 위해 나는 매번 여행자료집을 만들어 나누어 가진다. 지금은 좋은 어플도 많고 휴대폰 기능도 훌륭하지만 왠지 앞으로도 여행책자 만들기를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여행의 본 일정만큼 준비 단계의 커다란 희열을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료는 사실 별 거 없다. 항공권과 호텔, 기차나 버스 예약 바우처를 넣고 날짜별 동선을 그린다. 혹시 휴대폰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 길이나 지갑을 잃는 일을 대비한 긴급 연락처도 쓴다. 이동 중 누가 언제 당충전, 카페인 흡입을 외치며 나동그라질지 모르므로 동선 내의 식당과 카페들도 여유 있게 표시한다. 마지막으로 날짜별 지출과 메모를 위해 빈칸을 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다섯 명 중 빈칸을 성실히 잘 채운 이는 여행을 준비하며 책자를 만드는 동안 함께 설렜던 나와 동생뿐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 기간부터 가슴 뛰고 설레게 만들어야 한다고 이 연사, 강력히 강력히 주장해 본다.

이 연사? 갑자기 튀어나온 낱말과 문장을 이해 못 하는 젊은이들은 여행책자를 만드는 것도 쓸데없다 여기겠지. 그렇지만 나는

"나중에 너희가 크면 집집마다 냉장고도, TV도, 자동차도 있을 거야, 달나라에 가듯이 너희는 다른 나라로 여행도 갈 수 있을 거야."

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세대다. 지금에서야 이 말들을 돌아보면 우스울 정도로 너무나 당연한 예언이지만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들으며

"에이, 이 세상에서 달에 가 본 사람이 손으로 꼽고 TV도 모여서 보는 우리 마을에 집집마다 자동차라니?"

의아하거나 의심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이다.

이를 테면 비행기를 타는 일이란, 그 먼 거리를 중간에 기름도 한 번 넣지 않고 수 백 명에 수화물까지 싣고는 나를 미지의 신세계로 데려다준다는 자체로 경이롭고 황홀한 일이었다. 이 정도 옛날 사람이기에 생각만으로 부풀어 오르는 해외여행을 미리 서두르지 않고 배겨낼 도리는 없었다.



처음 항공권을 구입하면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오래전 G사의 지도 활용방법을 익히게 되고, 저렴하게 구입하는 법, 목적지에 따라 뷰가 좋은 좌석을 선점하는 방법, 비행기나 외국 철도의 좌석 배치도를 미리 알아보는 법도 그 시기에 처음 익히게 되었다.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인데 외국의 철도청, 버스 회사들의 예약 바우처와 문의사항까지 챙겨지는 것이 신통방통했다. 안에서는 쉽사리 새는 바가지처럼 덜렁거리는 나지만 타지에서 미아 신세가 될까 봐 긴장하고 확인 또 확인해서 그런지 희한하게도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

자유여행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과정이 있어서도 좋은 경험이지만, 나도 미처 몰랐던 숨은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마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해서 좋다.

"나, 아직 괜찮구나!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구나."

항공권만큼의 값을 치르면 내 쓸모를 일깨워주는 일이 생겼다. 그랬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도 다시 느끼게 해 주었으니 결코 항공권만 구입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주 미리서 항공권 구입을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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