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잡일을 대하는 슬기로운 태도

경험에 의미를 더하면 경쟁력이 된다

by 혜지

비슷한 연차의, 이제 막 사회생활을 헤쳐 나가고 있는 친구들과 만나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것까지 내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던, 신입 연차라면 한 번씩은 거쳐가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도 일로 쳐주는 건지. 대체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면서 꾸역꾸역 해내는 일을 우리는 보통 '잡일'이라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때로는 골치 아픈 일.


공교롭게도 나는 '허슬' 정신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내 일이고, 너의 일이고, 잡일이고 할 것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 특히 당시에 속해있던, 성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실행하는 조직에서 내 일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광고 콘솔은 잠시 덮어두고, 영업 스크립트를 달달 외워 처음으로 '콜드콜'에 도전했다.


콜드콜은 아웃바운드, 즉 잠재 고객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말한다. 사전에 약속된 고객과의 전화가 아니고, 정말 0부터 시작하는 방식의 영업이다. 아웃바운드는 인바운드보다 전환율도 낮을뿐더러, 영업 방식 중에서는 난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의 성과 달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었지만, 처음 전화를 걸기 전까지 망설이던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 마케터인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할까.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봤지만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처음 전화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띄엄띄엄 스크립트를 읽던 첫 전화. 바로 전환시키지는 못했지만 첫 전화를 마무리하고 나니,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난 김에 나는 할당받은 목록에 차례로 표시를 해가며 전화를 해나갔다. 중간에 싫은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화를 끊고 잠깐 호흡을 고르고 나니 또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콜드콜을 모두 해냈다.


콜드콜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따지자면 나에게는 '잡일'이었다. 해야 하지만, 누가 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시간이 드는 일. 그러나 나는 이때를 기점으로 고객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뭇 달라졌다. 마케터인 나에게 '고객'이란 어디까지나 지표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였다. 특히 퍼포먼스 기반의 마케팅을 주로 하면서, 고객의 실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전화 속의 목소리로 만난, 제품에 대해 궁금해하고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은 분명히 실체였다. 그들의 목소리로 듣는 제품, 시장 상황은 새로웠다.


그리고 나는 고객을 만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마케터가 되었다. 모니터 화면의 차트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나는 고객을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해달라 섭외 전화를 하고, 직접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렇게 온라인상의 마케팅과 오프라인에 존재하는 고객 간의 간극을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고, 정말 고객이 필요로 하는 콘텐츠를 기획했다.


경험에서 의미를 찾으면 경쟁력이 된다. '그 날은 일도 못하고 전화만 잔뜩 돌렸다'고 끝냈다면, '현장에서 인사이트를 얻는 마케터'같은 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을테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는 잡일에도 의미를 더해 나의 경쟁력으로 만들고 싶다.


신혜지(@ssineji) | 마케터
좋아하는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생기면 책을 읽고, 배운 것을 글로 기록합니다.



더 읽을거리


keyword
이전 07화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