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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보자의 책기둥 무너뜨리기

병렬독서가의 연휴 마지막날

by 윤서린

지적 허영의 끝판왕 격인 나는 "적독가"의 삶을 산다.

책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다. 어려서 마음껏 가져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심리적 보상일까.

나는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그만큼 읽는 사람은 또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책이라는 물성 자체,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는 수많은 삶과 이야기, 작가들의 상상력과 사유를 사랑한다.


표지가 예뻐서,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작가라서, 편집 디자인과 텍스트의 배열이 마음에 들어서, 이렇듯 책을 사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고전의 경우 똑같은 책을 출판사별로 사기도 하고 초판디자인이 나왔다고 하면 또 산다. 양장본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손에 착 감기는 촉감, 두께감, 종이를 넘길 때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까지 마음에 든다. 지적허영의 끝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들이고 싶지만 표지가 얇아서 패스한 상태다. 가볍고 가격을 낮추기 위한 선택이겠지만 나는 양장본이 좋은걸 어찌하랴. 만약 양장본 세트로 출간되면 나는 할부의 노예가 되어 세계문학전집을 살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야금야금 양장본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세계문학전집을 채우고 싶다.



9시가 되면 불 끄고 자야 했던 어린 시절, 나는 무거운 솜이불을 덮어쓰고 손전등을 빛 삼아 아빠가 누군가에게 얻어온 빛바랜 세계명작동화를 읽다 잠들었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먼 나라의 낯선 곳으로 나만의 여행을 떠났다. 엄마, 아빠 어느 누구도 나를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지 않았으므로 책이 유일한 나의 애정의 대상이었다. (한글을 배울 시기까지 두 분의 존재가 내 삶에 없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의 결핍은 책에 대한 집착과 사랑으로 자라났다.


결혼하고 아이넷을 키우면서 책에 대한 욕심은 자동차 한 대 값을 탕진하고서야 잠시 멈췄다.

어느덧 셋은 성인이 되고 초등학교 5학년 막내가 그 책을 온전히 물려받았다.

1200자 책장으로 8개가 넘는 아이들의 전집과 수많은 책은 이사하면서 집에 다 들이지 못하고 창고에 보관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먼지가 쌓이고 있다.


첫째 아이를 육아하면서는 내 어린 시절을 보상하듯 온 진심을 다해 책을 읽어주었고 자연히 둘째 아이의 태교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둘째 딸은 언어적으로 꽤나 빨랐다.

그러나 셋째 아들부터가 문제였다. 우울증이 깊어지면서 제대로 책을 읽어주지 못했다.

넷째 아들은 난독증이 있어서 초등 입학 후에도 한동안 글을 읽지 못했던 시기를 보냈다.

이게 다 내가 어려서 책을 같이 읽어주지 못한 탓인 것 같아서 죄책감으로 마음이 참 힘들었다.


지금은 도서관도 잘 되어있고 원하는 책은 전자책으로 볼 수 있으니 굳이 아이들 책을 사지 않는다.

가끔 서점에 들르면 원하는 책을 사준다. 늘 그렇듯 엄마가 사주고 싶어 하는 책과 아이들이 사고 싶은 책은 다르다. 아이는 다행히 나를 닮지 않아 아직은 책에 큰 욕심이 없다. 있는 책도 다 읽으려면 잠도 안 자고 읽어도 몇 년이 걸릴 것이다.


막내의 성장시기에 맞게 창고에 있던 책을 야금야금 가져와서 꽂았다. 내 책과 같이 꽂기에는 아이방 책장 하나와 거실의 책장 하나로는 부족했다. 거실 바닥과 식탁 위에 책기둥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가 시골에 다녀온 사이 남편이 서프라이즈로 1200자 책장을 세 개를 더 가져와 거실 벽한 면을 책장으로 가득 채우고 뿌듯해했다. 내심 칭찬을 기대한 모양인데 나는 속으로 남편이 괜한 짓했다고 생각했다.

집이 너무너무 답답해 보였다. 거실 한쪽은 대형 텔레비전이 차지하고 맞은편은 책장 4개가 커다란 벽처럼 서있었다.


하나둘 쌓여가는 책기둥이 눈에 거슬렸는지 내가 거실을 서재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혼자 낑낑거리며 책장을 옮긴 것이다. (여러 차례 이삿짐센터 없이 손수 이사하면서 책 수천 권을 끈으로 묶고 박스에 담아 나르면서 무거워서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터인데 심지어 그 안에 들어있던 책을 혼자 다 빼고 책장 세 개를 싣고 왔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가.)

고생한 것도 마음이 쓰고 책장이 넘어질까 봐 책장 네 개를 다 연결해서 고정시켜 놨으니 다시 빼라고 하기에도 미안했다.

덕분에 아이책을 꽂고 내 책도 몇 권 갖다 꽂으니 책장이 여유로웠다.

이때부터 나의 책 집착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들 책이 아닌 내가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들로 한 칸씩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언젠가 북카페 겸 문화공유공간 놀이터를 만들고 싶기 때문에 내가 읽은 책은 그 쓰임이 분명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밑줄을 치고 내 생각을 써놓은 책들이라 다른 사람들이 읽으면 좀 부끄럽기도 할 테지만 그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과 문화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내 꿈이다.


다행히 남편은 아이들 책 사는 걸 뭐라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찔려서 새로운 전집을 들이면 장롱 안에 뒀다가 몇 권씩 책장에 꽂아 놓곤 했는데 날마다 바닥에 책기둥이 늘어나니 남편도 다 알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아이들이 책기둥 사이에서 놀고 책 읽다 잠들고 퇴근한 아빠 무릎에 앉아 쫑알거리며 책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내심 좋았던 모양이다.


사실 남편이 나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는다.

거의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쉬는 날은 거의 하루 종일.

다만 휴대폰으로 웹소설의 무협, 판타지, SF 분야 책을 탐독한다. 그러니 우리 집 책의 지분에 남편 책은 없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이 다니던 책대여점이 문을 닫는다고 하자 자기가 인수해서 몇 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엉뚱함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끌려서 이 남자를 좋아했었나 싶다. (과거형인 건가...)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분야의 책을 좋아하니 부부끼리 서로 책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첫째 딸과 남편은 비슷한 장르를 좋아해서 이야기가 가끔 통하는 것 같다. 은근히 부럽다. 나도 집에서 책이야기 하고 싶은데.

내가 읽는 책을 같이 읽자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남편이 싫다고 해서 권하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서 내가 먼저 남편이 읽는 책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요즘 들어 생겼다.

결혼 25년 만에 이걸 깨닫다니... 이런 내가 놀랍다. 관에 누워서 이 생각을 안 한 게 다행이다.

그래서 이번에 읽기 시작한 내 생애 첫 SF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 줄거리를 슬쩍슬쩍 흘리면서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조만간 이 책을 같이 읽고 남편과 책수다를 떨 수 있으려나.


요즘 전자책으로 책을 읽고 종이책을 사지 않는 소비구조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종이책을 산다.


다 읽지도 못하지만 책이 좋아서 구입하는 독자들을 출판계에서는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라 지칭하고, 일반 사람들은 "지적 허영"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렇게 책을 좋아해서 읽는 것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현저히 빠른 사람들, 책을 쌓아두는 사람들을 일컬어 "적독가"라 한다.

나 역시 책을 사랑하기에 책을 읽기 전까지 '임시 보호'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 중이다.


한강 작가님이 책장에 읽지 않는 수많은 책이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말에 어느정도 적독가로서의 정당성을 얻은 것 같아 내심 기쁘다.

여동생은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느냐고 나무라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책은 꼭 읽으려고 사는게 아니야. 굳이 끝까지 다 읽어야하는 것도 빨리 읽어야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날 그날 내 감정과 필요에 따라 책을 고르는 행위, 책 제목에서 받는 위로, 날 위한 선물, 책 속 한 문장을 통해 바뀌는 삶의 태도, 한문장을 마음에 품고 곱씹고 아껴가며 읽는 충만함, 그리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언제든 마음껏 밑줄치며 읽을 수 있다는 행복감, 그리고 지금 다 못 읽으면.... 죽어서라도 읽지 않을까?"


동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책상이 키보드 자리만 겨우 남기고 책으로 가득 찼다.

그동안 매일 병렬독서로 읽은 책들이 책기둥이 되어 내 앉은키와 맞먹으려고 한다.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어제는 새벽 두 시까지 옷장 정리를 했다. (물론 다 못함)

오늘은 책장 정리를 해볼까 한다. (물론 다 못할 예정)


책을 전체적으로 다 빼고 장르와 분야별로 나눌 예정이고, 읽은 책은 따로 빼서 꽃을 것이다.

말 그대로 소장용 책은 한쪽에 잘 보이게 배치해서 나의 허영심을 한껏 채울 것이다.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와 "빈센트 반고흐"의 책들은 특별히 지정석을 정해줄 예정이다.


에세이, 산문, 글쓰기, 기록에 관한 책, 시, 자연과 전원생활, 영감과 창조에 관한 책, 철학서, 예술, 미술서적, 고전, 현대소설(소설은 거의 없는데 최근에 몇권 들임), 자기 계발서로 분류하고 책장 칸마다 70퍼센트만 채우고 비워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만간 또 채워질 거니까 여유가 있어야 책기둥 수를 줄일 수 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수많은 책기둥이 쌓였다 무너지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나의 부동산 지분을 책과 함께 공유하는 삶을 택했다.

최종 목표는 내 책들을 위한 아담한 공간을 갖는 것이다.

그곳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 글쓰기과 그림, 음악, 손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

그러니 빠른 시일 내에 로또 당첨이 됐으면 좋겠다.

아, 물론 로또를 안 사니까 확률은 제로지만, 이미 나는 내 거실에 그 공간을 만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책 정리하다 괜히 책 펼쳐보느라 책기둥만 수십 개 만들어 놓고 오늘 하루가 지나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부디 눈감는 날까지 책기둥 사이에서 행복하게 길을 헤매기를.


추신) 책장 정리가 계획대로 된다면 올 해안에 책장뷰를 공개해 보겠습니다. 모두 평온한 마지막 연휴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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