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기로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날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시부모님 점심상을 차리는 대신 집 앞 카페로 혼자 놀러 나왔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이번 명절에는 아픈 후로 몸이 덜 회복된 상태라 명절음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른들의 허락도 받은 터라 마음은 좀 불편해도 두 눈 딱 감고 쉬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서 계속 뒹굴거리고 SNS만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이대로 이불속에서만 보낼 순 없다.
먼 곳까지 나갈 힘은 없고 기분 전환은 하고 싶으니 염치 불고하고 둘째 딸이 임시로 일하는 동네 카페로 발길을 옮긴다. 사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내 아지트인데 딸이 잠깐 취직해서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가 최근 들어 딸이 퇴사한 후 다시 찾게 된 곳이다. 오늘은 명절이라 인원이 부족해서 임시 출근을 한 둘째였다.
혹시 몰라 카페에 들어서기 전에 안을 들여다보니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많이 없어서 슬그머니 가벽 뒤 안 쪽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읽다만 메리 루플 산문집 <가장 별난 것>을 펼친다.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난 작가지만 그녀의 글을 몇 편 읽고 좋아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박연준 시인도 메리 루플을 좋아하니 더없이 좋다.
오늘은 그녀와 내가 통하는 글을 만났다. 바로 “탐조”.
그녀도 새를 관찰하고 새에게 모이를 준다.
나랑 똑같다.
새를 위하는 마음보다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선다는 것도 부끄럽지만 통한다.
새의 움직임, 날갯짓, 고갯짓, 노랫소리를 듣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오늘은 추석인데 새들은 과연 어떤 하루를 보낼까?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느 한 곳에 모여서 모이를 찾는 행사를 갖고 있을까? 최고로 맛있는 씨앗이나 열매를 서로 먼저 찾겠다고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벽녘에 내린 비로 일정이 취소되고 쫄쫄 굶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서 모이통 채워줘야지…
추석날 아침인 오늘은 간단하게 차린 밥상으로 오랜만에 위아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우리 가족 여섯과 시부모님, 같이 사는 조카까지 9명이 한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은 입맛이 없다며 갈비 한 조각만 맛보고 밥을 먹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위아래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밥을 먹는 것은 말 그대로 연례행사에나 가능하기에 그 시간은 소중하다.
시부모님도 나이 들어가시니 과연 앞으로 몇 년이나 이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내려온 아이들 때문에 한차례 소동이 있었다. 아무리 같이 살고 매일 마주치는 사이더라도 어른들과 추석 명절에 아침밥을 먹는데 잠옷 차림으로 내려오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틀린 걸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둘째 딸과 막내아들은 다시 올라가서 옷을 챙겨 입고 내려오고 첫째 딸과 셋째 아들은 그대로 밥상에 앉는다. 더 이상 말하면 밥이고 뭐고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것 같아 신경을 끄고 식사를 했다.
밥을 먹는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두통 때문인지 화가 나서인지 모르겠다. 둘 다 인 것 같다.
아이들은 각자 먹은 그릇을 들고 차례대로 줄 서서 설거지를 하고 위층으로 다시 올라간다.
나는 남편과 시어머니와 커피 한잔을 타마신다.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군걸까?
추석 명절 인사로 친지나 지인들에게 다정한 한가위가 되라고 인사를 전했는데 정작 나는 다정은 커녕 언성이 높아졌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런 찹찹한 기분을 오래 가지고 가는 건 좋지 않다.
아직 연휴가 많이 남았고 나는 얼른 이 기분을 털어내야 한다.
추석 점심은 이런 나의 기분을 전환할 예쁘고 건강하고 맛있는 걸로 챙겨 먹기로 한다.
며느리, 엄마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내가 나를 챙긴다.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남은 샐러드를 마저 먹고 책을 조금 더 읽다가 슬그머니 집에 돌아가 누워야겠다.
아무래도 눕지 못하는 건 쉬는 게 아니다.
아직 나에게 연휴 동안 11번의 밥상차림이 남아있으니 힘을 내야 한다.
말 그대로 좀 더 너그러워지고 다정한 시간을 위해 큰 딸에게 슬며시 먼저 말을 건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