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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Dec 12. 2024

4. 초원을 달리는 두 바퀴

상큼 오싹한 몽골의 아침


몽골에서 맞는 첫 아침.

구름을 머금은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저편 언덕엔 안개가 낮게 드리워져 있다. 어제 저녁 쏟아진 우박은 풀숲에 었는지, 대지가 삼켜버렸는지 흔적이 없다. 설핏 부는 바람이 상큼하면서도 오싹한 기운을 풀고 스친다. 춥다. 방으로 들어가 긴팔 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는 데도 오들오들 떨린다. 일교차가 심하다고는 들었지만, 이곳 아침은 벌써 여름을 뛰어넘어  속으로 깊이 들어선 느낌이다.

 

에르덴의 아침 풍경

강을 건너는 소떼


잠에서 깬 청춘들이 하나 둘 마당에 모인다. 어젯밤 분위기에 취해 많이 달렸는데도 모두들 쌩쌩하다. 아침 식사 전에 가까운 곳으로 시험 라이딩을 하기로 했다. 젖은 풀밭을 지나 마을 길을 따라 돌아가니 강이 나온다. 토르강이다. 강폭이 제법 넓고 물살도 거침없다. 강가엔 부지런한 무리의 소떼가 물을 마시고 있다. 인근 농장에서 키우는 가축인 듯 하다. 물을 다 마신 소들이 하나 둘 강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강 건너로 유유히 헤엄쳐 간다. 농장주가 나와 강물 쪽으로 몰이를 하지않는 데도 스스로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강 건너 풀밭이 생존을 위해  나은 환경이라는 것을 체득한 본능적 행렬이리라. 강 중간쯤은 물살이 꽤나 급해 보이는데, 아랑곳없이 시린 강물을 거슬러 간다. 언뜻 급물살에 떠내려갈 듯 싶다가 안간 힘을 다해 쫓아가는 녀석들도 있다. 혹시나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숨죽이며 지켜보던 우리는 그들이 모두 강 건너 저편에 이르서야 안도의 숨을 쉬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저들은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 강을 건넜겠는가! 살아남기 위해 자연에 적응하고 이겨나가는 생명들이 이를 지켜보는 이방인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TV에서 아프리카 초원의 강물을 가로지르는 동물들을 본 적은 있지만, 눈앞에서 보는 신기한 광경은 경탄을 금할 길 없다.


토르강을 건너는 소떼


야생의 땅, 초원을 달리다


야생의 땅을 달리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제 공항에 마중 나왔던 두 명의 가이드가 하얀색 승용차를 몰고 온다. 우리 라이딩의 길잡이가 되어 줄 사람이다. 마을을 벗어나는 승용차를 따라 조금 달리니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이 하늘을 품고, 하늘이 초원을 품고 있다. 하늘과 초원이 맞닿은 광활한 초록의 지평선이 열린다. 초원 위에 아무렇게나 그어진 붉은 황톳길을 따라 달린다. 초원의 길은 우리가 여직 국토종주 길에서 달리던 포장도로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울퉁불퉁 거친 흙길 위에는 깊게 파인 고랑이 있고, 진흙탕 물 웅덩이가 있고, 크고 작은 자갈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뾰쪽하게 박혀있는 돌멩이들이 달리는 자전거를 위협한다. 자칫 넘어질 위험까지 있어 조심스럽다. 황톳길을 벗어나 풀섶으로 들어가면, 바퀴가 풀에 감기면서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보지만 속도를 낼 수가 없다. 황톳길과 초지를 번갈아가며 달린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친 야생의 땅을 한참 달리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요령도 생긴다. 포장도로의 경우 시간당 평균 20 Km 이상 달릴 수 있지만, 초원 라이딩은 그 절반 정도의 속도 밖에 낼 수가 없다. 그래도 흙길이 주는 부드러움과 풀밭의 푹신한 느낌이 전해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듯 짜릿하다. 힘이 들만도 한데 아무도 힘든 기색이 없다. 그저 이 길을 달리고 있는 순간이 행복할 뿐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는 두 바퀴 위에는 환호성과 희열이 넘친다.


초원을 품은 청춘들


몽골 초원에 제주도의 '오름'이 있다?


다섯 개의 젊은 심장과 열개의 바퀴가 초원을 달린 지 두어 시간이 흘렀다. 달리고 달려도 같은 듯 다른 듯 끝없는 초원이 이어진다. 드넓은 초원을 달리는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듯 낮은 구릉이 자주 나타난다. 낮고 부드러운 곡선이 마치 제주도의 '오름'을 닮았다. 몽골 초원에 제주의 오름을 옮겨놓은 듯 정겹다. 우리는 그 오름을 바라보며 달리고, 힘들게 오름을 오르고, 내리막 길을 달리며 희열을 느낀다.


몽골 초원의 오름?


우리 제주도에는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을 비롯한 360여 개의 크고 작은 오름이 있다. 제주 사람에게 오름은 생활의 무대이다. 가축을 방목하고, 밭을 일구며, 죽어서는 낮은 돌담을 두른 무덤에 잠든다. 나는 제주도에서 몇 개의 오름을 오른 적이 있다. 낮은 구릉이지만, 오름 정상에 서서 황량하고 이채로운 제주의 또다른 맛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몽골 초원의 구릉도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구릉에는 게르가 있고, 어김없이 가축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다. 크고 작은 구릉 정상에 오르면 또다시 이어지는 막막하고 끝없는 초원을 만난다. 초원은 몽골 유목민 삶의 터전인 것이다. 초원에서 만나는 몽골 오름은 초원을 달리는 또 다른 맛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곧 길이다.


초원의 강


강을 만났다. 아니, 강이라고 보다는 작은 도랑이다. 초원의 강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다. 한 무리의 말과 소떼가 물을 마시며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물이 생명의 근원이다. 강수량이 적은 몽골 초원에서 생명을 키우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강을 만나면 강을 건너고, 습지를 만나 바퀴가 푹푹 빠져도 그 길을 가야 한다. 몽골 초원 위에는 특별한 길이 없다. 물론, 자동차가 다니면서 자연스레 그어진 황톳길(그 옛날에는 우마차가 다니던 길이었겠지 ...)이 있지만, 그 길 만이 길이 아니다. 광활한 초원은 가지 못할 길이 없다. 동물들 만의 세상이었던 초지 위에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곧 길'이다.  


초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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