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무심히 흘러도 기다리는 날은 어김없이 온다. '열혈청춘만세'의 세 번째 약속의 날이 밝았다. 몽골, 일본에 이어 민족의 영산, 백두산 라이딩은 더욱 벅찬 기대 속에서 기다려왔다.
이미 꾸려놓은 커다란 배낭을 둘러메고, 내 친구 '행복이'와 함께 길을 떠난다. 자전거와 함께 대중교통으로 인천항 가는 길은 그리 녹녹지 않다. 전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인천항 국제터미널.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비릿한 내음새 낮게 깔린 항구가 조금은 을씨년스럽다. 항구의 터미널이 거대한 고래처럼 큰 입을 벌리고 우뚝 서서,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들이마시고 토해내고 있다. 고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시끌벅적 소란한 낯섦을 만난다. 3층 라운지로 올라가니 5박 6일 동안 함께 할 얼굴들이 모여 있다. 우리 서울팀 '열혈청춘만세' 여섯을 비롯,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온 17명의 라이더들이 아직은 서먹한 눈인사를 나눈다. 곧 익숙해질 얼굴들이다. 다소 귀찮고 지루한 출국심사를 마치고, 객실에 짐을 벗어던지니 온몸으로 나른한 행복이 밀려온다. 선상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침대에 눕는다. 뉘엿 지고 있는 서녘 햇살이 작은 창을 비집고 들어온다.
선상 갑판에는 많은 승객들로 붐빈다. 중국 단동(丹東)으로 떠나는 배가 축복처럼 붉게 물드는 노을을 끌어안고 미끄러지 듯 달린다. 이른 아침 동해바다를 헤집고 솟아올랐던 맑은 해가 온종일 허공을 떠돌다가, 고단했던 하루를 서서히 뉘이고 있다. 저녁노을은 언제 봐도 신비하고 경이롭다. 불타는 목마름으로 가라앉는 태양에게 가만히 말을 건넨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푹 쉬어요!"
내 인사에 화답하듯, 붉은 미소로 방긋 웃는다. 서녘하늘의 거대한 붓칠은 멈추지 않고 절정을 향해 치닿고 있다. 한줄기 바람이 불타는 구름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화폭을 가다듬고 있다. 모두들 넋을 잃고 구름과 태양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神의 작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차츰 노을이 사위어가고, 하늘은 떠나는 배,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며 고요하고 아늑한 위로를 뿌리고 있다.
객실로 돌아와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고, '열혈청춘만세'의 세 번째 해외 여정을 한 잔 술로 자축했다. 행복에 젖은 몸으로 어둑한 갑판에 다시 섰다. 이글거리던 태양은 바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숨바꼭질하듯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친다. 아직 완전히 살찌우지 못한 보름달이 달무리에 싸인 채 바다를 은빛물결로 적시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영도 시인의 詩 '달무리'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鶴)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밤하늘의 달무리를 보며 우주였던 어머니, 학 같이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시던 어머니를 그리는 시인의 詩心을 생각한다. 그날 밤, 시인의 눈에 비친 달무리는 어머니의 눈물이고 가슴이었을 것이다.
밤 배는 시커먼 바다를 달리고,
쓸쓸한 슬픔 같은 달무리는 파도가 되어 요동치며 뒤를 따른다. 언뜻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다.
달빛 가득 채우고 '떠나가는 배' 위에서 '떠나가는 하루'를 가만히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