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영주 농협에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수십여 명의 평가사들이 모였다. 앞으로 영주 인근 지역의 사과 과수원 착과수조사가 끝날 때까지 함께 할 동료들이다. 사전 교육 과정에서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는 같은 팀 얼굴들도 보였다. 아직 조금은 어색하지만, 반가운 얼굴들이다. 조사요령 및 주의사항에 대한 간단한 교육이 끝나고, 2인 1조로 함께할 조사팀이 구성되었다. 조사 원장이 배분되고, 곧바로 현장으로 출발했다.
과수원에 도착했다. 계약자와 인사를 나누고, 첫 '사과 착과수조사'가 시작되었다. 생애 첫 조사에 나선 풋내기 평가사인 나는 풋사과처럼 풋내 나는 설렘 속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뭇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평가사의 리드 하에 표본주에 붉은 리본을 달고, 계수기로 착과수를 세며 과수원을 돌았다. 첫 조사에 이어 과수원 두어 곳 조사를 마치니, 긴장은 풀리고 제법 일이 손에 익었지만 온몸이 끈적이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후텁지근한 장마철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온몸을 감싼다. 장화에 휘감기는 풀들이 이슬을 뿌리며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걸음걸음마다 개구리와 풀벌레 몇 마리 폴짝폴짝 뛰어 숨고, 놀란 장끼 한 마리 푸드덕 날아간다.
밤을 새워 책 속 활자로 익히던 적과 후 착과수, 평년착과수, 표준수확량, 미보상비율 등......
그 많은 시간 나를 괴롭히던 낯설고 우아한 단어들은 온데간데없다. 단지 작렬하는 태양과 찌는 무더위, 그리고 굵은 땀방울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땀 흘려 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과수원을 누비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새벽부터 숨 가쁘게 보낸 하루를 마치고, 피로에 지친 몸을 씻어내는 시간은 오히려 경건하고 행복하다. 침대에 누우니 피곤이 온몸을 전율처럼 파고든다. 엄지와 새끼발가락, 허리에 약간의 통증이 온다. 첫날인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말 힘든 일이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세상 편하게 누웠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한 그릇의 밥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렇듯 평생을 육체노동 하셨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잠 못 이루는 객지의 첫날밤이 하릴없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