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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어린 '물욕의 화신'

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by 차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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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이었을 때의 기억인 것 같다.

그 당시 속칭 '워크맨'이라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가 유행이었다.

나에겐 제법 터울이 있는 형이 있다 보니, 어린 나이임에도

10대 중고등학생들의 유행에 제법 빠르게 그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름 트렌드에 민감한 어린이였다.


그렇게 당시 나는 그 속칭 '워크맨'을 몹시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딱히 내가 음악을 좋아하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가 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 귀에 꽂혀 길게 늘어 떨어져 있는 '이어폰'이라는 물건이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워크맨'이라는 물건은 당시 제법 고가의 제품이었고,

부모님을 조른다고 해서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쉽사리 사주실 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번은 몰래 형의 '워크맨'을 가지고 나갔다가 된통 두드려 맞기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형의 '워크맨'을 몰래 가지고 놀았던 것이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나의 진짜 목표인 '이어폰'. 바로 이 '이어폰'이라는 물건은 '워크맨' 본체와 분리가 되며,

별도의 물건임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게 필요한 것은 고가의 워크맨이 아니라 워크맨의 부속품인 이어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는 어린이는 동네 '전자 오락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틈만 나면 오락실에 살던 어린이였다. 그렇게 '이어폰'을 갖고 싶어 고심하던 어느 날,

오락실의 크레인 뽑기 안에 상품으로 이어폰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나의 용돈은 하루 500원, 당시 일반 전자 오락은 한판에 100원,

난 100원으로 30분은 족히 놀 수 있을 만한 자신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크레인 뽑기는 200원이었으며, 그마저도 1분도 체 안 되는 시간이 주어졌다.

100원과 200원 금액적으로는 2배의 차이, 30분과 넉넉잡아 1분, 30배도 넘는 시간의 차이.

어린 나에게 크레인 뽑기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계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어폰'을 갖기 위해 매일매일 크레인 뽑기에 도전했다.

가끔은 친구가 뽑힐 것 같다며, 200원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친구들은

그만하라고 돈낭비라고 비웃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한 달 가까이

크레인 뽑기 기계에 꼬박꼬박 동전이 생길 때마다 넣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비교적 물욕이 적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린 시절 나는 거의 '물욕의 화신'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달 즈음되었을 무렵일까?

그날도 크레인 뽑기에 도전하려고, 달려간 오락실.

오락실 주인아저씨 께서 크레인 뽑기 기계를 열고 상품을 채워 넣고 계셨다.

그 관경을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를 주인아저씨 께서

알아보시고는 내게 물어보셨다.

"너 대체 뭐가 갖고 싶은 거냐?"

나는 당당히 이어폰이라 답했다.

그렇게 주인아저씨는 내게 그 이어폰을 그 자리에서 공짜로 꺼내 주셨다.

(물론 그간에 내가 들이부었던 동전들과 노력을 생각하면 공짜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드디어 얻어낸, 꿈에 그리던 그 이어폰을,

아무 소리도 안 나오는 그 이어폰을 귀에 꽂고 또 반대의 빈 이어폰 잭을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놓고는 멋지게 폼을 잡으며 동네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다녔던 기억이 난다. 물론 오래가지 않았다.

아마 한 3일 정도 그렇게 다녔나? 금방 싫증 나고, 또 귀찮아서 그 이어폰을

어딘가 쳐 박아뒀던 기억이 난다. (원래 어린이들은 뭐든 금방 싫증을 내곤 한다.)


우연찮게 쇼핑몰 쿠X을 구경하던 중,

가정용 크레인 뽑기 기계를 발견하고는 잠시 추억에 잠겨 봤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고 인터넷으로 뭐든 살 수 있는 요즘 같은 시절에,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저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이기까지 했던,

저돌적인 어린 '물욕의 화신'이었던 내가 그립기도 하다.

.

.

.

내 기억이 맞다면, 이어폰 이후, 이 어린'물욕의 화신'은 '지포라이터'에 꽂혀서

한참을 또다시 크레인 뽑기 기계에 동전을 잔뜩 들이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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