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물 끓기 3분 전
최근 이래저래 벌려놓은 일들도 많고, 그런 일들이
쌓이고 겹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고, 그 시간들마저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가 많아졌다.
사실 물리적인 시간도 시간이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마음의 여유도 같이
잃어간다는 점이 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는 내가 평소에 즐기던 몇몇의 일들을
포기하거나, 간소화해야 했고, 애석하게도 그중
매일 밤 홀로 즐기던 찻자리 또한 포함해야 했다.
쉼을 위해,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해 시작한 찻자리인데,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이 찻자리를 간소화한다는 것이
정말 내가 생각해도 모순적이고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포기할 생각은 없기에, 할 수 있는 선에서 차를 즐기기 위한
좀 더 간편한 방법을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먼저, 차를 마시는 양을 좀 줄일까도 생각해 시도해 봤지만,
매일 즐기던 양을 줄이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었고,
차를 마시는 양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
바쁠 때나, 여유가 없을 때는 티백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평소 즐기던 차는 잎차였지만,
그간 이래 저래 선물 받고 또 사 모았뒀던 티백이 제법 있다.
바로 그간 쌓아 뒀던 티백을 마시기로 했다.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그 효과는 제법 컸다.
잎차는 덩어리(차 편)에서 찻잎을 뜯어내어 (해괴)하여
적당량을 저울로 조절하고, 차종에 따라 적당히 식힌 끓인 물을
살짝 부어 찻잎의 기운을 깨우는 (새 차) 과정을 거쳐
비로소 첫차를 우려낼 수 있었던, 이 일련의 과정을
'퐁당!'
하고 티백 하나 끓인 물에 담그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또한, 차를 우리기 위해 개완이나 공표배, 숙우, 거름망 같은
여러 다기들 역시 티백을 사용함으로써,
주전자와 찻잔,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머그컵 1개로
설거지를 줄일 수 있었다.
솔직히 맛의 차이는 모르겠다.
내가 소장 중인, 티백과 찻잎의 차의 종류가 다르기에,
비교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근본적이 문제가 있다.
찻잎을 정성스럽게 우려 차를 마실 때에는 차 맛과 향에
집중을 하고 느끼려고 할 때가 많았다면,
요즘처럼 티백으로 간편하게 차를 우려내기 시작하면서
그냥 별생각 없이 물 마시듯 그저 입으로 털어낼 뿐이게 된 것 같다.
혹자들은 티백을 우려내면 티백의 섬유나 접착 풀의 맛이 느껴진다고도 하는데,
내가 그렇게 까지 민감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그저 정성을 쏟지 않았으니, 그만큼 소홀하게 대하는
나의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편한 만큼, 소흘해지는 어리석고 간사한 나의 마음...
지난 주말 제법 큰 일 하나가 마무리되어 다시 티백이 아닌,
찻잎을 오랜만에 우려낼 수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났다!)
글쎄, 누군가는 위에 말했던 차를 우리는 일련의 과정을 두고,
겉치레 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설사 겉치레라 할지라도
역시 나에게는 이렇게 차를 즐기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요즘처럼 바쁠 때 차를 계속 즐길 수 있게 도와줬던,
간편한 티백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유로울 때 천천히 티백을 한 번 즐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