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전쟁의 실상 01
표지 사진 출처: 폭격으로 파괴된 이라크 방송통신센터(SO Radio, TV, Telecommunication Center) 빌딩 / 현지에서 본인이 직접 촬영
대사관에 돌아오자마자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염 중위에게 핀잔을 들었다. 할 말이 없었던 현우는 쉐라톤 호텔 뷔페식당 매니저가 출타 중이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늦었노라고 둘러댔다. 못 마땅한 눈치가 역력하면서도 염 중위는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볼 뿐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취침 중에 현우는 뇌성벽력 같은 폭발음에 화들짝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어서 콩 볶는 것 같은 총소리와 폭발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폭발로 인한 불기둥이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넋을 잃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염 중위가 숙소로 뛰어 들어와 쌍욕을 섞어가며 빨리 완전 무장을 갖추고 튀어나오라고 호통을 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현우가 허둥지둥 군복을 입고 전투 헬멧과 소총을 들고 숙소 바깥으로 뛰어나오니 이미 다른 해병대원들은 모두 군장을 갖추고 대사관 요소요소에 배치돼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현우도 해병들과 뒤섞여 총구를 대사관 바깥으로 겨누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바그다드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염 중위의 소대원들은 모든 잔뜩 긴장한 상태였으나 웬일인지 전임 소대장인 백 중위의 소대원들은 비록 완전무장한 상태이긴 했지만 별로 긴장한 기색도 없이 심드렁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실전을 처음 겪는 현우는 더럭 겁이 났다. 아르빌에서도 가끔 부대에 비상이 걸리곤 했으나 실제 전투가 벌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 상황은 피아간에 공방이 벌어지는 실전상황이었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것 같은 총성과 폭발음이 연달아 들리고 폭발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하늘이 번쩍번쩍 빛났다. 잠시 후 공중에서 둔탁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미군 아파치 헬기 편대가 밤하늘을 가르며 전방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현우는 바그다드에 도착하던 날 강 중위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바그다드는 역시 밤이 제 격이라더니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공격이 그린존 내부에까지 미치지는 못 했으나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과 폭발음 그리고 충천하는 화광 때문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현우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밤을 지새웠다. 전투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새날이 밝자 백 중위와 소대원들 그리고 대사관 직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과를 시작했다. 간밤에 그 같은 대소동이 있었는데도 어쩜 그렇게 태연한 지, 그런 그들이 현우는 너무나 이상했다. 더구나 오늘 정오에 예정돼 있던 백 중위와 소대원들의 환송연을 그대로 진행한다는 소리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환송연에는 현우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현우는 비록 백 중위가 지휘하는 소대 소속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함께 아르빌로 복귀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환송연에 동참하도록 지시받았다. 현우는 영 꺼림칙했으나 상관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현우 일행은 오전 11시경 군용 트럭과 승용차에 나눠 타고 대사관을 빠져나와 쉐라톤 호텔로 향했다. 까디시야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다 오만 스퀘어(Oman square)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동 중에 왼쪽으로 그린존의 상장인 '승리의 손(The Hands of Victory)' 조형물과 ‘무명용사기념탑(Monument to the Unknown Soldier)’ 등 과거 이란과의 전쟁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알 라쉬드 호텔을 지나 7월 14일 거리로 들어서 검문소를 통과해 이제 막 레드존으로 나서려는데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검문소 앞 길가에서는 어젯밤 전투의 잔해를 치우는 작업이 부산히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 이곳에서 그린존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이라크 저항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군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 같았다.
도로 한편에서는 미군 공병대가 불도저를 동원해 불타버린 자동차를 도로 바깥으로 밀어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라크 인부들이 미군의 지시에 따라 도로 위에 어지러이 널린 전투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들이 치우고 있는 것은 비단 전투의 잔해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군에게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저항세력의 시체들도 함께 옮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몸통이 산산조각 나서 시신을 온전히 수습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라크 인부 두 명이 군용 모포를 펼쳐 놓고 유혈이 낭자한 도로 위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사체 조각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현우는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절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해병들은 그 끔찍한 광경을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도로 위에 널브러진 시신들과 작업 중인 인부들을 피해 지그재그로 차를 몰아 현우 일행은 서둘러 그 섬뜩한 장소에서 벗어났다.
30분 정도를 더 달려 현우 일행은 마침내 쉐라톤 호텔에 도착했다. 대사가 주최하는 환송연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대사가 먼저 백 중위의 소대원들에게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무사귀환을 바란다는 환송사를 했고 이에 백 중위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에게 감사한다고 답사를 했다.
백 중위와 소대원들은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홀가분함 때문인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하지만 현우는 어젯밤 전투와 오는 길에 봤던 소름 끼치는 장면이 떠올라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흥은커녕 속이 느글거려 제대로 식사를 할 수조차 없었다. 음식을 쳐다만 봐도 욕지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송연을 즐기는 해병대원들이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다. 현우는 그들이 그런 험한 꼴들을 이미 6개월이나 견뎌낸 베테랑들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송연의 분위기가 견딜 수 없었던 현우는 화장실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호텔 로비가 훨씬 더 쾌적했으나 뷔페식당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가 역겨워 아예 호텔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제 6 장 전쟁의 실상 0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