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구사일생 03
표지 사진 출처: Suicide Bomb Attack in front of Assassin's Gate @ AP. Jan 19, 2004
그때였다. 갑자기 트럭 밑으로 서둘러 움직이는 두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총격을 피해 도망치던 두 다리는 멈춰 서더니 방향을 틀어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면서 땅바닥에 쏟아져 내린 탄피가 현우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굴러왔다. 대굴대굴 굴러와 얼굴에 닿는 탄피는 아직까지 뜨거웠다.
다음 순간 두 다리가 휘청거리나 싶더니 두 다리의 주인은 그대로 땅바닥에 퍽 엎어졌다. 구트라(ghutrah: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의 아랍 남자들이 머리에 두르는 흰색 두건)로 얼굴을 가린 아랍 사내였다. 총을 맞고 쓰러진 그 사내는 눈도 못 감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현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공이 커다랗게 풀린 것으로 보아 이미 절명한 것이 분명했다. 엎어진 사내의 가슴팍에서 선혈이 흘러나와 현우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번져왔다. 흐르는 피가 바닥을 타고 엎드려 있는 현우의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데도 현우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너무나 섬뜩한 장면에 현우는 그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나 겁이 나던지 바지에 오줌을 쌀 뻔했다. 현우는 한동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바깥 상황이 궁금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현우는 그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아스팔트 도로 위에 얼굴을 박고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총소리가 그치고 나서 얼마 후 꿈결처럼 아련히 무언가 음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억지로 고개를 들어 보니 현장 수색에 나선 한 미군 병사가 트럭 옆에 한쪽 무릎을 뚫고 현우를 내려다보며 무사한지 여부를 묻고 있었다.
그제야 현우는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간신히 트럭 밑에서 기어 나와 몸을 일으키려는데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일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불타는 자동차, 도로 위에 나뒹구는 시체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는 부상자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매를 들어 얼굴에 묻은 피를 훔쳐내며 한동안 넋을 잃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문득 염 중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사한 걸까? 현우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트럭 반대편으로 돌아가 염 중위가 앉아 있는 쪽 차문을 열었다.
염 중위는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넋이 완전히 나가긴 했어도 몸은 무사한 듯 보였다. 하지만 초점 잃은 눈동자에 멍한 얼굴이었고 실금 했는지 바지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천만다행이었다. 현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상황 정리에 나선 미군이 외국인 생존자들을 재촉해 길 위에 뒤엉킨 차들을 안전한 그린존 안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현우는 필사적인 의지로 심신을 수습해 다시 운전석에 올라 트럭을 몰고 그린존 안으로 향했다. 암살자의 문을 지나 대사관에 이를 때까지 현우는 정신 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운전했다. 군용 트럭이 대사관 정문 앞에 멈춰 서자 그제야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긴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현우의 머리에 눌린 자동차 경적이 빽하고 비명을 내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긴장이 풀린 현우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제 7 장 구사일생 0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