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3학년 초 쯤으로 기억 된다.
군사 정권시절 참교육을 표방하시던 아버지는 해직되어 실직 하시었다.
교육자 출신이어서인지 그 많은 사업 중에 태극기 시업을 부산에서 하시었다. 고향의 실직한 동료들을 다 데리고 자선사업 하시는 것처럼 하시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찾아 부산으로 이사 했고 나는 본의 아니게 친구들과 이별하였고 부산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친척의 울타리엔 온통 교사들이었기에 교사에 대한 낯설음은 없었지만 도시의 중심 학교에서 착실하게 생활하면서 나의 꿈인 판사가 되기 위해 충실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당시는 교육청(교육위원회)이 정한 날짜에 가서 추첨을 하면 학교가 배정되었다.
난 구덕 운동장 옆에 있는 미션 계통의 여자중학교에 배정되었다.
엄마는 "부산여중이나 중앙여중을 왜 안걸렸냐?"고 나에게 원망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며칠 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배정된 학교를 방문 했고 학교장실에 가서 교장선생님과도 인사를 하였다.
아버지는 그 교장선생님이 학교 선배 라시며 나를 잘 봐 주실 것이니 걱정 말고 공부 하라고 하셨다.
아버지 말씀 대로 학교는 예전의 학교와 별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녀 보니 미션계의 사립 여중의 담임 교사는 여태껏 제가 경험하고 알던 그런 분은 분명 아니었다.
대다수의 삶이 궁핍하던 시절,
그 당시는 "저축은 미덕"이란 슬로건 아래에
학급당 저금 액수에 따라 학급 담임의 능력 유무가 결정 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나보다.
출석부 가지러 교무실에 가면 초록판 대형 칠판 한 켠에 학급별 저축액수를 비교하는 것이 있었다. 막대그래표를 그려서 눈에 띄게 표시해 놓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무실 출입을 하는 친구들은 새로운 뉴스를 생성 하여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곤 했다.
학교 저축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어쩌면 사치였을
그 시절!
중학생 한번 저금액이 거금 5,000원은 예삿돈이 아니었다. 저금하고 난 후 통장이 재발급되지 않은 (전입생)때에 돈만 입금하면 저금을 했는데 안 했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었다.
출장온 여직원 한 사람이 전교의 많은 학생돈을 통장에 끼워 가져 가서 은행에서 표기 해서 한 달 후에 가져 오기 때문에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발생 하면 그것을 정정하는 것도 어렵고
돈을 저금하고도 착오가 있어 손해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 했고 또 상당히 성기신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착오를 방지하려면 통장이 발급된 후에 통장에 연필로 연하게 5천원을 표시하여 제출 한다.
그 다음 학급의 저축부장이 그것을 확인하고
학급별 모은 통장을 노란 고무줄로 튕겨 은행원에게 주면 한 달 후 다시 그 은행 직원들이 학교에 가져와서 학급별로 나누어 주는 시스템이었다.
지금 인공지능시대 관점에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70년대는 그랬다.
그날 나는 평소에 심부름하고 엄마에게 받아 모은 돈 오천원을 저금액으로 학교에 가져 왔다.
돈을 갖고 있었음에도 통장이 발급되지 않은 상태라 저축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나와 친한 저축부장 이순이는 "돈 착오가 생기면 자신이 채워야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하면서 통장 나온 후에 하는 게 어떻겠니?" 했고
나도 가난한 순이가 돈을 변상하는 것은 실컷 일하고 욕 먹는 격이라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저축일에 하는 것이 헷갈리지 않을것 같았고 다음달에 저축하기로 그녀와 협의 했다.
그 날 아침 자습이 끝날 무렵 우리의 베토벤 선생님이 등장 하여 아침 조례를 했다.
베토벤을 보자 아이들은 습관처럼 조용히 했다.
베토벤은 한번 휙 훑어보더니 그러고는 느닷없이
"저축 하지 않은 사람 일어서라"는 것이다.
이 지시에 난 놀라 엉겹결에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우리반 68명의 학급 인원!
그 때 일어난 사람은 단 두 사람,
지금은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도 학생이던 맨 뒤에 앉은 아이랑 나였다.
그 때 담임은 우리를 향해 고함치며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하였다.
무서움과 두려움에 질린 나는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란 판단을 하면서 부절히 그 아이보다 먼저 다가갔다.
담임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어 사정없이 나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눈에 빛이 스치듯 지나간 자리에는 수치심과 모멸감만 덩그라니 남았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아본 매.
그후 처음으로 사람을 미워했다.
순간 나를 때리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렇게 중학 2학년이 지나고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중요한 3학년이 되었다.
난 베토벤 담임만 피해 달라고 기도 했다.
학교목사님 시간에 들은 뜻 모르는 말로써
기도한 때문일까?
나의 바람과는 대조적으로 중학 삼학년 반편성 결과는 재수없이 베토벤 담임 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