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베토벤의 머리를 한 옛 담임과 유사한 사람을 만났다.
순간 놀랐다.
인생은 피하고 싶은 것은 만나게 되는 것이 운명인가 보다.
취미 생활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합석하게 되면서 지인은 그를 소개 하였다.
모 대학 경제학과를 나오고 북경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예전의 그와 유사한 사람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다소 유연한 연륜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축적 되었지만 그 당시 십대 때에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베토벤 담임에게 있어서 나는 저금 한번 안 한 것이 낙인이 찍혀서 나에 대한 인식이 그의 선천적인 롤펌 처럼 영구할 모양인 듯 했고 내가 생각해 보면 매사가 꼬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해 우리반은 소풍지를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정했고 우리반 여핵생들은 교복을 단정히 입었다.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상의 반팔 셔츠와 검정 개더 스커트. 그리고 여자는 아무데서 옷을 갈아입거나 벗으면 큰일나는 일인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
오후의 프로그램중에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가서 노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반 68 명중 10 명 남짓만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바닷물에 들어 갔고 나머지는 수영복으로 환복하지 않았다.
당시 무서운 권력인 담임의 지시보다 부끄러움을 먼저 생각했던 사춘기 순수한 우리 소녀들은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에서 빛나는 모래 사장의 반사를 받으며 두시간 남짓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다.
태양에 뒤질세라 얼굴이 붉어져 갔지만 우리반 대다수 여학생들은 약속한듯이 베토벤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저항하기를 약속한 적이 없었다. 그냥 마음이 그리 통일되게 흘러갔던 것일 뿐.
바깥에서 몸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는 아마도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담임이라도 그 앞에서 수영복 입고 당당하게 놀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일게다,
그 이후 누가 처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베토벤에게는 깡패란 별명이 붙여졌고.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서는 그렇게 지칭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여지껏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아이들 어릴 때 갔던 워드피아도 남편이 데리고 들어가고 난 마른데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왜일까? 그날 이후 살아오면서 수영복 구입은 해도 수영복을 실제로 입지는 않았는지 이제 그 이유가 무의식속 저 심연에 내재되어 있었음을 ᆢ
고등학교 원서를 쓸 시기가 되었다.
사실은 베토벤과는 진학상담도 하기 싫었다.
인문계 진학에 성적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었으며 성적도 상위권이고 모범생이었기에 자연스레 인문계 진학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1차 상담 때는 "인문계"를 말했다. 피는 물보다 진한 탓에 교육자이신 아빠와 엄마를 빼닮아서 금지된 것은 한번도 어기지 않고 살았다. 아니 어기지 못하는 천성이 짜증 나지만 그건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표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베토벤 은 우리반 경희와 나에게 유독 집착하면서 계속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경희의 아버지는 구덕운동장옆의 큰 건물에 입점하여 제과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경희네는 경기가 있을 때마다 호황 경기를 이루어 문전성시한 현금 부자였다.
베토벤 담임과 상담을 하고 온 경희는 투덜거리며 '담임이 와이루 받으려는 것 같다.' 는 것이다.
난 사실 그 때 경희의 그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와이루는 나쁜 의미의 어휘란 걸 인지하고 있었고 학생 입에서 와이루 받는 선생이라고 단언하는 경희가 심하다고 그 당시는 생각 되었다.
그런데 경희는 나보다 세상 보는 눈치가 재빨랐다. 경희는 담임 싫다면서 와이루까지 주고 싶지 않다고 확언했고 그녀는 실업계를 선택했다. 그녀는 담임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것을 안 모시고 간 것이다.
그 다음 내 차례였다. 3차 상담이다.
난 1차와 2차 상담 때 이미 인문계를 확정했는데 왜 자꾸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담임이 너무 집요하게 그러니까 '부자인 경희도 실업계로 정했는데 나도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볘토벤은 교무실 의자에 앉아 쳐다보지도 않고
"그동안 생각해 봤나?"
그의 기세에 눌러 난 작은 소리로
"인문계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베토벤은 하던 일을 멈추더니
"공부만 하면 다 인문계 가냐고?" 하는 것이었다.
베토벤이 말한 내포는 무엇인지 차치하고라도 난 그의 비아냥 거리는 듯한 핀잔과 함께 가정사를 고려하지 않는 형편없는 아이로 어느새 전락하고 말았다.
실업자인 아버지와 가족구성원을 들먹이며 대학에 들어가는 돈의 총액을 언급하며 나의 장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는 고마운 분이었다.
베토벤! 그분의 권력 앞에서 무참히 왜소해진 나는 어떤 아쉬운 소리도 그에게 하기 싫었고, 약해 보이기도 싫었다.
그러면서 실내화로 뒷통수 맞았던 일이 상기되었다.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면 엄마를 오시고 올 필요도 없고, 와이루 오만원 봉투 건네지 않아도 되고, 만사 해결이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토벤과의 대면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베토벤이 원서 써 주는 학교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저항도 없이 진학 했다.
뽀족한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그 때, 나의 나약함을 인식하면서, 잠시나마 나쁜 마음을 먹었다.
이듬해가 되었다. 친구들을 통해 베토벤의 부고(마흔 초반)를 접했다.
나는 조문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이 보고 있기에 체면을 생각하여 나의 두달치 용돈을 부의금으로 하여 친구편에 부쳤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후회했다. 사람에 대해 나쁜 생각은 절대 품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베토벤과의 타협하지 않았던 내 길은 지금 생각해보면 멀리 돌아오는 수고로움은 있었다. 하지만 난 비굴하게 살지 않았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군상들의 모습에서 실망하게 될 때, 억울하게 오해 받을 때, 적당히 견제하는 것이 훤히 내다 보일 때, 어색함에 익숙치 못한 나는 내적 몸살을 자주 하곤 한다.
오늘 만난 친구의 지인인 그도 역시 그도 베토벤머리를 하고 있고 베토벤일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요구하는 돈이 인플레한 것이며, 요구의 방법은 상당히 은유적으로 진화되었다,
속물!
하지만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미움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자해행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