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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 어린 시절(1)

by 로캉


내 문학적 고향은 가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우리 집은 god의 노래와도 같이 너무 가난했다. 나는 지금은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지만 그 당시 서울의 대표적 산동네로 유명했던 옥수동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4남매 중 막내로 살았다. 그 시절 우리 동네 집들 대부분이 그렇듯 집은 외벽으로 된 지어질 때부터 낡은 주택이었다.

몇 장면의 동화로만 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집장사하는 작은 아버지 덕(?,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생략하고)에 우린 30년이 지난 뒤에 재개발로 허물어질 때까지 그 방 2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그나마 1칸은 작은 아버지가 세를 놓으셨으니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아온 것이다.

겨울이면 집은 꽁꽁 얼었고, 한강도 썰매를 탈 정도로 얼었다. 연탄불에 올려 논 큰 솥에서 뜨거운 물 한 바가지로 나눠 세수하고 곤로에서 끓인 콩나물 김칫국에 밥 말아먹고 학교 가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안에 있는 시골 같았던 동네에도 양옥집들과 멀리 아파트도 들어섰지만, 내 기억 속에 우리 동네는 그저 촌스럽고 더럽지만 정겹던 달동네였다.

여름이면 우물에서 등목 하고, 겨울이면 큰길까지 썰매길을 만들어 타고, 어머니들의 연탄재로 그 길이 없어져도 다음 눈 오기를 기다리던, 해 질 녘까지 놀던 숨바꼭질, 오징어 놀이, 다방구, 망까기 등 수많은 과거의 기억은 이제는 없어진 공간이고 지나간 시간이지만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내게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동네에서 한강 쪽으로 내려가던 길 (24. 로캉. 펜+유성색팬)


겨울이면 하얗게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눈 내리는 비탈길을 따라 아직은 차량이 많이 없던 시절에 한강 근처 국민학교에는 반별로 65~67명씩 빼곡하게 앉아 공부하던 곳이었다. 당시 내게 학교는 너무 큰 사회조직에 던져졌다는 압박과 문화적 충격을 견뎌야 하는 곳이었다. 점심시간에 학교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마치 양식장에 가둬 둔 물고기 같이 이리저리 혼란스러운 모습이었고 교실에서는 서로 힘 자랑하는 아이들의 동물 우리 같았다. 내게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집중하는 습관을 키웠고 가끔 부조리에 화가 나던 것을 참아내던 시기였던 것 같다.

우리는 2차 베이비 붐의 정점에 태어나서 가장 치열한 경쟁을 하고 이겨내야 했던 시대에 살았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에 국민학교는 한 반 65명, 15반, 6학년이니 학생수만 6000명 가까이 됐고, 교실이던 운동장이든 화장실이든지 어느 곳에나 아이들이 넘쳐났다.

세상에 나와 살아 갈수록 점점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나만의 세계에 숨어 살기 시작했다.

그 세계는 문학, 아니 (너무 거창하고) 책 읽기였고, 시작은 나 홀로 숨어 있을 수 있는 조그만 ‘다락방’에서부터였다.

……..


매봉산 쪽에서 본 옥수동 전경이 아닐까 (24. 팬화)

지금은 사라진 계단(24. 펜화+색팬)


- 25.11.9. 로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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