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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2 주년, 가족과 함께 식사

뷔페는 혈당관리에 적이지만, 오늘은 치팅데이입니다(D-296)

얼마 전에 결혼을 한 것 같은데 어느덧 결혼한 지 32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 평범하고 순탄하게 긴 세월을 살아왔네요.


정신없던 결혼식 날

결혼식 당일은 정신이 없는 게 정상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결혼식을 끝마쳤는지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3월 6일 결혼 당일 아침, 경복궁에서 웨딩사진을 촬영해야 하는데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춥지는 않았지만 눈은 펑펑 내리고, 바닥은 질퍽거리고, 웨딩드레스와 구두는 진흙이 묻고...


촬영 후 바로 결혼식장으로 가는 도중에, 저희가 탄 차를 뒤에서 따라오던 촬영스태프의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들이받아 뒤 범퍼가 부서졌습니다. 그런데 이 차는 그날 운전을 해준 입사동기가 자기네 팀 선임한테 빌려온 차량이니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었지요. 물론 저도 아시는 분이라 더 미안하게 되었고요.


결혼식장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급한 대로 ○○회관이라는 곳으로 잡았는데, 큰 길가를 벋어 난 곳에 있다 보니 찾아오시는 하객들은 길을 헤매기 일쑤였고, 주차장도 좁아 주차할 곳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매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결혼식장과 다르다 보니 하객들이 계실 곳이 협소하여, 모두 식장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하객이 식장 안으로 들어왔으니 습하고 더운 실내 환경에, 방음이 안 되어서 쩌렁쩌렁 소리가 울려대니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이 와중에 사회를 봐주겠다고 한 친구가 안 와서, 대신 다른 친구가 급하게 사회를 보고...


무슨 코미디 영화를 한 편 찍듯이 우연과 우연이 겹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당탕 정신없이 결혼을 한 것에 비해, 결혼 후 얼마 안 되어서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도 낳고, 나름 잘 자라주어 취직도 하고, 딸애는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큰 다툼이나 가출과 같은 아픈 기억도 없었고, 그 흔한 "우리 헤어지자"라고 말한 적도 없었네요. 그러고 보니 다소 밋밋하게 살아온 것 같기는 하지만 아픈 상처 없이 살아온 게 고맙기만 합니다.



지난 2023년 3월 6일은 결혼 30주년이었는데, 애들이 이를 기념한다고 '축하 케이크와 24K 금장미', 그리고 '결혼 30주년을 축하하잖나'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사이즈 측량을 잘못해서 커도 너무 커서 거실 한쪽을 전부 채울 정도인지라, 붙이느라 고생을 좀 했네요.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게 정말 고맙더라고요.

결혼 30주년.png [한쪽 벽을 꽉 채운 플래카드]
[축하 케이크, 24K 금장미 그리고 감사 카드]

저는 이 날 받은 것 중에서 가장 감사했던 것이 바로 카드였는데요.

"결혼 30년 동안 항상 화목한 가정 감사해요! 어머니 아버지의 자녀라서 행복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길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글보다 '어머니 아버지의 자녀라서 행복합니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느낌이었습니다.



벌써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났네요.

결혼기념일에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순간적으로 생각난 곳이, 바로 평촌에 있는 '마빌리에'라는 뷔페였습니다. 사실 혈당 관리를 위해서는 많이 먹거나 당을 올리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저한테 뷔페는 '악의 소굴'과 같은 곳이지요.

다행히(?) 아직 연속혈당기를 부착하지 않았으니, 오늘은 맘 편하게 '치팅데이(Cheat Day: 다이어트 기간 중 하루를 정해, 먹고 싶은 음식을 양껏 먹는 날)'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임신 중인 딸애도 이번 기념일에는 참석해서 모처럼 완전체 가족식사가 되었네요.

뷔페 사진.png

역시 오랜만에 오니까 사방팔방에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쌓여있습니다.

그래도 혈당 상승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식사법을 수행하기 위해 샐러드 먼저 먹고, 회를 집중 공략하는 방식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가능하면 탄수화물과 당류가 있는 음식은 피해 다니고 있었는데, 그만 한번 들린 디저트 코너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빵, 과자, 케이크, 아이스크림 등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케이스 안에서 저보고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개만 먹자고 했는데 두 개, 세 개... 그리고 나중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먹었습니다.

'치팅데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음식조절을 했었던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억제가 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결국 배가 불러 음식을 더 이상 거들떠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뷔페와의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네요. 아마 혈당이 300mg/dL 이상은 우습게 넘었으리라 생각하니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모처럼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맛난 음식도 먹었으니 그럼 된 것이지요.


식사 후 계산대로 가니 딸애와 아들이 자기네가 내겠다고 합니다.

하긴 저희 결혼기념일인데 저희가 내는 것도 좀 우습기는 해서, "알았다. 잘 먹었다"라고만 했네요.


크게 바랄 것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요즘 제 모습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집에서 쉬고...

매우 당연 시 하던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감사합니다.


조그만 것에도 감사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남은 기간도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자 합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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