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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쌀알 권지연 Dec 08. 2022

사랑을 가르쳐 주시오




 젊고 파릇파릇하던 시절에 안도현 시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오후 내내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저녁이 되어서야 마쳤다. 연수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궁금했던 것, 하고 싶었던 말이 휘몰아쳤는데, 고개를 돌려 오른쪽에 앉은 시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순간, 말을 고를 틈도 없이 대뜸     


  시를 잘 쓰려면 어떡해야 하나요?     



 ... 시인을 모셔다 놓고 한다는 질문이 너무 수준 높은(?) 질문이어서 그랬는지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일순 차분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에 질문을 던진 나는 뒤늦게 벌게진 얼굴로 현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진심으로 궁금했던 질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인은 웃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그리고 세 가지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첫째, 술을 마십니다. 둘째, 연애를 합니다. 셋째, 시를 많이 읽습니다.      



 여기저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사뭇 진지했던 다음 질문. “저는 술을 못 마시는데 어쩌죠?” 그러자 여유 넘치는 그분의 답변은     

 

           그럼 연애를 두 배로 하면 됩니다.        



 세 가지 비법은 간단한 것 같지만 간단치가 않았다. 그래도 시를 많이 읽는 것은 애써보면 되겠다 싶었지만 나머지는 막막했다. 열아홉의 나이로 ‘인생은 11자’를 외친 후 술과는 생이별을 했다( https://brunch.co.kr/@breeze95/46). 연애를 두 배로 하라는 차선책도 쉽지 않았다. 쓸데없이 자만추 연애관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미팅이나 소개팅도 관심이 없었다. 이십 대 중후반을 지나며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들어오는 소개팅 자리마다 나가보기도 하였으나 갑갑하고 지루했다.



 그러는 중에 어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내가 이십 대를 지나는 동안 주변 어디쯤에서 늘 같은 포지션으로 과하지 않게 얼쩡거렸다. 6년을 한결같이 얼쩡거리던 남자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유쾌하고 따듯했다. 3년 연애 후 결혼을 했으니 시인이 전수해준 ‘연애 두 배’ 차선책도 실패였다. 애초에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기는 글러 먹은 것이다.       



 그런 나와는 달리 시인이 될 싹수가 다분한 자들이 여기 있다. 열다섯 소년 J는 오늘도 여친 자랑으로 뭇 소년들의 염장을 지르고 있다. 아무도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지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쌤쌤쌤 어제 여자 친구 만났어요! 걔가 이랬는데, 저래서, 그래 가지고.. 암튼 너무 예뻤어요!” 그러면 S도 지나간 여친 이야기로 거든다. “그 누나(?)랑 만났을 때 같이 밥 먹고 카페에 갔는데.. 그래서 그래 가지고 좋았어요 너무.”      



 장차 훌륭한 시인이 될 녀석들이로구나.. 내가 실패했던 '연애 두 배'를  너희는 이미 아무렇지 않게 실천하고 있구나. 아무도 시킨 적이 없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어 청출어람이 따로 없다네. 술이야 스무 살이 되면 몸이 먼저 찾아 나설 것이고, 시만 읽으면 되겠네. 시만.      



 여친 자랑을 할 때의 저 표정, 행복에 겨워 찌그러지는 눈매와 씰룩거리며 내려올 줄 모르는 입꼬리, 무턱대고 전진하는 목과 얼굴, 과도한 제스처, 우렁차고 리드미컬한 목소리, 180이 넘는 큰 키가 무색할 정도의 해맑음, 가득 차서 넘쳐흐르는 행복, 행복, 행복. 보고 있자니 나까지 달달한 행복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듯하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눈 내리는 운동장을 열다섯 소녀, 소년이 함께 걷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고서.

 사랑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문제는 학교 운동장이었고, 열다섯이었고, 하필 그것을 교장 선생님께서 보신 것이다. 눈밭의 아름다운 연인은 풍기문란죄로 교장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그래도 학교 운동장에서 그러는 건 너무 했지, 싶다가도 그럼 학교 운동장이 아니면 괜찮은 건가 싶다가,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연애는 무슨. 하다가, 아 거참 사랑 첨 해보나 훅 치고 들어오는 사랑을 무슨 수로 막을 거야 하다가, 사랑이 밥 먹여줘?  응응 사랑하면 밥 안 먹어도 배불러..     



 열다섯은 사랑이 궁금하고, 사랑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 국영수보다 사랑이 시급하다. 뭇 소녀 소년들은 J나 S처럼 지금 당장 추진력을 보이지 않더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알고 싶다. 그래서 끊임없이 선생님의 첫사랑과 중간 사랑, 끝 사랑을 물어보며 그 말랑한 이야기에 같이 설레고 싶어 한다. 누가 이 마음을 막을 수 있을까. 학교 앞 분식집 떡볶이를 절대 사 먹지 마세요 한들. 학교 앞 분식집은 날마다 문전성시다.        


   

 눈을 감고 낮고 조용히 생을 돌이켜볼 수 있을까. 거슬러 올라가도 좋고, 따듯하던 엄마의 배 속이 생각난다면 좀 멀긴 해도 거기서부터도 좋다.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래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면, 마음이 저절로 따듯하게 데워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순간엔 반드시 그 어디쯤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인생에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그러니 차후 교육과정 개정 시 ‘사랑’ 과목 신설을 조심스레 촉구하는 바이다..     



 애초에 사랑 없이는 성립이 될 수 없는 삶이기에 너를 사랑하면서 나도 사랑할 수 있는, 함께 성장해가는 사랑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엔 그러하지 못한 사랑도 많고, 어른이라도 사랑은 어렵다. 그래서 때론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울고, 사랑이 증오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 배우는 것. 세상과 사람과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넓혀가는 배움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배우려면 가르치는 자도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좀 곤란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선책에 좀 더 힘을 기울였어야 했다. 두 배의 노력으로 연애를 했다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멋진 선생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연탄재는 못 되더라도 번개탄 같은 시를 쓰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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