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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하신가영 Mar 02. 2024

'불행'이 입 밖으로 나온 날

그렇게 불행의 무게가 가벼워졌고, 나는 회복되고 있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너무나 많은 가난과 불행의 기억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가난의 기억 1


당시 살았던 집이 전세였는지, 월세였는지는 너무 어린 시절이라 나는 잘 모르겠다.

호랑이할머니 집 뒷칸에 있는 좁은 두 칸짜리 방을 얻어 다섯 식구가 살았다.

연탄비를 아끼기 위해 한방에만 불을 넣어 다섯 식구가 함께 생활을 했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부엌도 외부에 있었고,  

그 부엌은 욕실이기도 해서 거기 쪼그려 앉아 머리도 감고 목욕도 했다.


그 부엌문으로 가끔 길고양이들이 들어오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혼자 집을 지키던 6살, 7살쯤의 나.

부엌에서 연결되는 안방 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건지, 긁어대는 건지...

그 작은 아이가 무서워 어른인 척 목소리를 흉내 내며 저리 가, 저리 가를 외쳐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너무 무서워서 아빠의 회사에 전화를 했고

삼촌의 가게에서 일하던 아빠는 울며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나를 데리러 왔었다.

집은 평온의 공간이라는 기억보다 늘 무섭고 좁았던 기억이 더 많다.



#가난의 기억 2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던 것 아니다. 그냥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어린이날이 되면 친구들의 엄마들이 보내준 공책, 간식... 등등...

우리 집은 그런 건 꿈꿀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아직 너무 어린아이였고,

친구들이 이거 우리 엄마가 보낸 거야,라는 말들이 그냥 부럽기만 했던 것 같다.

그날 작은 쪽지를 적어 엄마 가방에 넣었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요구르트라도 보내주면 되는 거 아니냐..

왜 엄마는 그런 것도 안 해주냐...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런 내용의 편지였던 것 같다.


나보다 5살이나 많았던 언니는

엄마가 그걸 읽고 많이 속상해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가난이 엄마의 죄가 아닌데

열심히 살아온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그렇게 가난 때문에 엄마를 아프게 한 딸이 되었다.


엄마, 그곳에서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 



#가난의 기억 3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던 나에게

엄마아빠는 서울에 보내 줄 형편이 되지 않으니 고향에 있는 간호전문대를 가기를 부탁했다.

간호전문대를 가면 당시 성적으로는 전액학비 지원이 가능했고

또 엄마아빠는 선생님, 간호사,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직업이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당시(아니 지금도) 피가 너무 무섭고, 간호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단식투쟁과 입학금만 해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앞으로 학비를 보태겠다는 약속을 하며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서울로 학교를 올 수 있었다.


서울의 삶은 너무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방의 가난한 소녀와 달리

부모의 도움으로 풍족한 삶을 사는 선배, 동료, 후배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자존심으로 가난의 흔적을 꽁꽁 숨기고 있었던 나는 더 쾌활한 척하며 대학을 누비고 다녔다.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시절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이 있다.

바로 "돈이 없어서..."라는 말이었다.


대학의 로망이라는 엠티를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가 아닌 고향에 일이 있어 못 간다고 했다.

친구들이 놀이공원을 가자고 하면, 돈이 없어서가 아닌 시간이 없어서라고 했다.

선배가 되면서 후배들이 밥을 사달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돈이 없어서가 아닌 약속이 있어서 어렵다고 했다.


늘 돈이 없어 걱정하며 사는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티 내지 않고 당차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좋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당찬 게 아니라 나의 치부여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가난의 기억은 셀 수 없이 더 많다,

옥탑방에서 살며 바퀴벌레가 무서워서 대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고

지하 월세방에서 살 때는 곰팡이와 지나가는 취객들의 구토소리와 잠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나는 성인이 되었고,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많진 않지만 서울에서 친구와 함께 작은 전셋집으로 옮기게 되었고, 

맛있는 밥 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내가 살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가끔 예쁜 옷과 구두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아주 작은 여유들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친했던 대학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해외에서 오랜 기간 있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나의 대학 시절 가난한 추억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적이 있었다고.

그래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돈이 없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고.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그런 나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순간 묘한 위로가 되었다.

가난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던 날 같은데

그걸 말하는 게 어떤 회복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글 속의 내 가난 이야기들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 같은 나의 치부 같았는데

이렇게 막상 글로 적고 보니, 그냥 그렇게 살았던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여겨지는 것 같다.


뭐가 그렇게 싫었을까?

뭐가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게 더 현실처럼 느껴질까 두려웠을까?

이제는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와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자랐고, 또 성숙했다.


지금의 너는 그날들을 딛고 이렇게 단단해진 거야 :)


이제 나는 돈이 있다. 차도 있다. 집도 있다.

누군가에겐 미미한 수준이고,

그 나이에 이것밖에 없냐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는 나에서 시작해 이렇게 자란 내가, 지금의 내가 참 이쁘고 소중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대의 삶을

치열했던 30대의 삶을 지나

이제 40대로 들어선 나의 삶을 쭉 돌이켜본다.



가난했지만 행복하다.

가난했지만 참 잘 컸다.

가난했지만 잘 살아왔다.

그 가난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말하고 싶다.

어느 힘든 순간이 당신의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면

내가 그랬듯 당신에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갈 수 있는 회복의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고..

당신의 입 밖으로 떠나버리는 순간이 오기를 응원한다고..


불행도, 행복도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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