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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신러너 Jun 14. 2024

감사하며 글쓰기(5) - 좋은 스승2

“평생 이렇게 살라는게 아니다”


적막한 고요함만이 있는 이곳은 여섯 평 남짓 대학교 부속건물 안 좁은 회의실입니다. 창문이 없어서 환기가 되지 않아 먼지 냄새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아마 빔프로젝트에 비치는 먼지가 선명하게 보여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조명도 밝지 않아서 적막함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장소입니다. 대학원 연구실 회의는 늘 이곳에서 진행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회의'라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오전에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실회의는 거의 예외 없이 열립니다. 대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열린다고 봐야합니다. 연구 지도를 받기 위한 학생들은 앞 테이블에 앉고 신입생은 뒤쪽에서 그 과정을 경청합니다.

교수님이 오기 전 각자 준비한 USB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옮겨 놓고 발표할 내용을 상기하면서 숨죽이고 기다립니다. 교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면,


"슈퍼 하드 트레이닝 실회의가 시작됩니다."


한 명 한 명 윗 선배 순서로 주간 연구 진행 상황을 발표합니다. 차례가 오면 나는 얇은 빨간색 포인터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정신없는 발표가 끝나면 지도교수님의 피드백이 이어집니다. 이때가 가장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입니다. 교수님은 굵은 초록색 포인터로 핵심을 딱딱 짚어주십니다. 마치 스타워즈의 광선검과 같은 초록색 빔으로 비수를 꽂듯이 본질을 꿰뚫는 피드백을 받습니다. 나는 초록색 광선검의 궤적을 어떻게든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는 내게 교수님의 피드백은 어디에 오리엔트를 맞춰야 하는지 그 좌표를 가리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 십분 발표하고 약 이십 분의 피드백이 이어집니다. 십분 발표는 대략 이러합니다.

"내가 이리 가는 방향이 맞습니까"

"도대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식의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이십 분 피드백에서 교수님은 내 연구 방향의 오리엔트를 수정해 주었고 더 나아가서는 인생 방향에 아주 큰 부표를 띄워주시기도 했습니다. 연구 방향의 오리엔트 몇 가지 그리고 인생 방향에 아주 큰 부표 하나를 소개합니다.


"연구원은 논문으로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정치가와는 아주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논문에는 꼭 오리지널리티—독창성—이 있어야 하는데 논문을 볼 때도 그 논문에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당신의 논문에도 당연히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뮬레이션 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든 연구의 시작은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이것이 연구의 본질이자 핵심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의 대답은 그에게 배운 대로 '오리지널리티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는 과정은 오리진—기원—을 찾아 떠나는 항해입니다. 관련 연구 문헌을 찾고 또 찾다 보면 그 줄기와 갈래가 보이고 점점 오리진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시작점인 오리진을 찾아 떠나야만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갖춘 창작에 한걸음 다가섭니다.


<운명적 공대생의 글쓰기>도 같은 원리입니다. 한 편의 연재를 위해 보이지 않는 독서 메모 정리 고민 생각 가끔 사색까지 백그라운드에서 나름대로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대출력을 발휘하여 오리진을 찾습니다. 이 과정이 올바르면 만족할만한 글이 탄생하고 이 과정이 부실하면 영 만족스럽지 못한 글이 됩니다. 이럴 때면 '힘드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정신이 코마상태에 빠집니다.

힘들거나 그만두고 싶을 때 꼭 떠올리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말은 실회의에서 교수님이 말한 것으로 내 인생의 큰 부표가 되었습니다.


"평생 이렇게—잠 못 자고 고생스럽게—살라는 게 아니다. 지금 이렇게 배운 걸로 평생 써먹는 거다"


나는 이 '거짓말'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떠올립니다. 내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배움이라는 것은 어차피 평생 배워야 하니까 '여기까지만'이란 게 없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깐 배움 사이에 쉼이 있는 것이지 공부에는 끝이 없어서 어차피 평생 배워야 합니다. 말 그대로 평생교육입니다.

아마도 교수님은 이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어린 학생들에겐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자네들이 '자연스럽게' 이게 거짓말인 걸 스스로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셨겠죠.


대학원생 시절에도 이 부표를 바라보았고 학교를 떠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도 이 부표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중심에 엔지니어의 삶 속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인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이 부표를 붙들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부표만 있더라도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절대 놓치지 않고 나는 이 거짓말에 한번 더 속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배운 걸로 평생 써먹는다'


"이렇게 슈퍼 하드 트레이닝 실회의가 끝났습니다."


팽팽한 고무줄이 느슨해지듯 갑자기 풀리는 긴장감 탓에 금요일 오후에는 도무지 연구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애꿎은 마우스만 이리저리 왔다갔다 딸깍딸깍. 왠지 금요일 연재를 마무리하는 지금 그때와 비슷한 그 기분입니다. 마라토너의 '러너스-하이'를 느끼듯 연구생 시절엔 '실회의-하이' 그리고 오늘은 '연재-하이'를 느낍니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 '감사하며 글쓰기'하기를 참 잘했다는 마음입니다.




*05~09화:    근면하게 글쓰기
*10~15화:    채집하는 글쓰기
*16화~25화: 고립되어 글쓰기
*26화~      :  감사하며 글쓰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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