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20화

20. 먼 훗날 순대국밥집에서

by 차태주

“내가, 왜 맨날 너희 집에 놀러 간 줄 알아?”

녀석이 소주를 한잔 훅 넘기더니 얼큰해진 목소리로 물어왔다.

“날 좋아했나?”

깝죽거리며 대꾸했다.

“ㅋㅋㅋ 지랄”

그사이, 우리가 앉은 은색 원형 테이블 위로, 주문한 모듬순대가 올라왔다. 주인 이모께 인사드리고 순대 하나를 집어 얼른 입에 넣었다.

“이야! 여기 순대는 어째 세월이 지날수록 더 맛있어지냐”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시던 이모가 이쪽을 보고 싱긋 웃어 주셨다.

간과 곱창도 장에 찍어 연거푸 입으로 가져갔다.

녀석에게 얼른 먹어보라고 손짓했다.

그러니 한동안 저 혼자 실실거리던 녀석이 곧 잔으로 상을 탁탁 치는 것이다.

“또 술 급하게 먹는다, 천천히 먹어 임마, 안주도 좀 먹고”

소주병을 이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존나 빡빡하게 구네, 네가 내 남친이니?”

“아 ㅋㅋㅋ, 옛날 일 가지고 시비 걸지 마라 진짜”

둘은 킬킬거리며 실없이 웃었다.

잠시 뒤, 녀석이 옅은 미소만 남긴 채 소주잔을 아련하게 내려다보는 것이다. 그 모습이 눈에 어색했다.

“아휴, 줄게 줄게”

얼른 술을 따랐다.

녀석이 히힛 하고 웃으며 상에 놓인 술잔을 집었다.

저녁이면 눈코 뜰 새 없던 그 시장통 허름한 순대국밥집도, 그윽한 밤이 되면 조용히 소주나 막걸리로 밤을 때우려는 중년 어르신들의 걸걸한 날숨들로 공기가 재워졌다. 그 무거운 적막 사이로, 이모가 켜 놓은 선반 위 TV의 하찮은 시끄러움과, 띄엄띄엄 들리는 어느 술 취한 아저씨의 거친 푸념 소리와, 한 잔 가득 막걸리를 우악스럽게도 부어 넘긴 수염이 덥수룩한 맞은편 아저씨의 트림 소리가, 오래된 조명이 식당 안을 퀘퀘하게 물들이는 그곳, 시장통 맛집으로 통하는 순대국밥집의 밤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그 역사적인 사건들 사이를 비집고 참석한 우리도 그 밤의 주인공일 터였다.

“우리 아빠 회사 망하고, 시골로 도망치듯 내려온 거 알지?”

“알지”

녀석과 잔을 부딪히고, 시답잖은 소릴 한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소주를 털어 넘겼다.

“내가 내색은 안 했지만, 그때 진짜 힘들었다... 아빤 빚쟁이들 피해서 고기잡이배 타러 가서는 소식도 없지”

녀석도 잔을 들이켰다.

“크흐... 엄만, 아빠 걱정에 밤이고 낮이고 맨날 울지... 그때 우리 집 분위기 진짜 쒯이었거든”

녀석의 목소리도 점점 걸걸해지고 있었다. 1차 2차에서 먹은 술의 취기가 이제야 슬슬 올라오는 모양이다.

“안주 좀 먹어”

접시를 녀석 쪽으로 밀었다.

녀석이 큼직한 돼지 허파 한 조각을 장에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씩씩하고 밝기만 했던 그 시절의 네가 사실은 힘들었었다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근데, 너희 집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겨주시고, 엄마가 간식도 해주셔, 일하고 들어오는 아빠도 있어... 그때 난 네가 진짜 부러웠다, 히히”

부러웠다고?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녀석의 잔에 술을 따랐다.

“부러울 게 뭐 있노, 아버님 무탈하게 잘 돌아오셨잖아”

녀석의 미소가 한층 더 화사해졌다.

이제 겨우 20대 후반으로 접어든 나이지만, 그럼에도 녀석을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세월이 꽤 흘렀다는 걸 실감한다.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오게 된 녀석이 이곳 순대국밥집에 처음 발을 들였던 우리 12살 무렵, 시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배우기 시작한 그 시절 20대였던 주인 이모도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가 돼 있으셨다. 구수하고 비릿한 순댓국 맛을 알게 되고부턴 우리 토요일이면 버스 타기 전 꼭 여기서 점심을 먹곤 했는데. 그러면 이모는 순대와 내장 한 접시를 서비스로 주시곤 했지.

녀석이 허연 이빨을 훤히 드러내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히히, 야 부랄친구! 짠 한번 할까?”

불알친구라니, 취기가 녀석을 감성적이게 만든 걸까.

잔을 부딪쳤다.

소주가 18.5도로 낮아진 그해, 소주는 더 이상 쓴 술이 아니었다. 혀를 비꼬고 넘어가는 그 어색한 액체만큼, 참 어색한 밤이었다. 그 밤, 녀석은 뜬금없는 고백을 해왔다. 그 고백은 이미 오래 지난 일에 대한 것이었지만 나름 충격은 있었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수수께끼로 남았던 빛바랜 질문들이 퍼즐로 맞춰지며 녀석의 진심을 알려왔다.

그날 이후 너는 왜 그렇게 날 어색해했던 걸까. 우리 졸업식 땐 그렇게나 미안해하고 아쉬워했으면서, 또 왜 그렇게 그 1년 동안 날 피했어야만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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