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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우울증을 이겨낸 라흐마니노프

by 에리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지휘자입니다. 2미터에 가까운 장신과 길고 유연한 손가락을 지닌 그는 한 옥타브를 훌쩍 넘는 음정을 거뜬히 잡아내며 특유의 깊고 풍성한 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음악은 낭만주의의 서정성과 러시아적 선율의 아름다움 그리고 개인적 고뇌가 결합된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깊은 좌절과 긴 침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1897년의 라흐마니노프


1897년,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 초연에서 혹독한 실패를 맛봤습니다. 지휘자는 준비가 부족했고, 평론가는 그의 음악을 “청중에 대한 모욕”이라 혹평했습니다. 스물네 살의 젊은 작곡가는 세상의 모든 빛이 꺼진 듯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3년 동안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도 손끝이 멈춰 있었고 악보 위에는 단 한 음도 놓이지 않았습니다. 깊은 우울증과 무력감, 창작의 마비. 음악이 사라진 그의 삶은 텅 빈 악보처럼 공허했습니다.


왼쪽 - 라흐마니노프/ 오른쪽 - 니콜라이 달 박사


그때 그의 삶에 등장한 인물이 신경학자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비올라 연주자였던 니콜라이 달(Nikolai Vladimirovich Dahl) 박사였습니다. 달 박사는 1900년 1월부터 매일 라흐마니노프를 만나 최면 치료와 긍정적인 암시(supportive therapy)를 꾸준히 반복했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작곡가입니다.
곧 다시 음악을 쓰게 될 겁니다.
당신 안에 있는 멜로디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짧고 단순한 말들이었지만 매일같이 반복된 그 말들은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씨앗이 되어 심어졌습니다. 그 씨앗이 싹트면서 하루가 다르게 그의 창작 의욕은 회복되었고 수면과 식욕 또한 돌아왔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그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과 3악장을 먼저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1901년에 1악장을 마무리한 뒤, 초연과 동시에 대성공을 거두며 화려한 복귀를 알렸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자신의 구세주였던 달 박사에게 헌정했습니다.



S.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관현악단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지휘 : 정명훈

피아노 : 에브게니 키신 Evegeny Kissin


이 작품은 세 악장을 따라 절망에서 회복으로 향하는 내면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1악장 Moderato는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는 낮은 피아노 음이 마치 무거운 장막을 들어 올리듯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는 듯한 그 여린 의지는 곧 음악과 오케스트라가 길을 찾아가는 대화로 이어집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외침이 그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2악장 Adagio sostenuto에서는 현악기 위에 피아노 선율이 조심스럽게 겹쳐지며 안정과 위안을 전합니다. 달 박사의 진료실에서 느꼈던 조용한 위로, 불안이 가라앉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험이 음악적으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13분 6초부터)


3악장 Allegro scherzando는 숨 가쁘게 질주합니다. 에너지가 폭발하듯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절망의 터널을 완전히 벗어나려는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25분 54초부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한 번의 실패로 삶이 깊이 흔들렸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한 예술가의 회복기이자 음악이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들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당신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주저앉아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문장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2악장 도입부를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1975년 미국 싱어송라이터 에릭 카멘(Eric Carmen)은 2악장의 주요 선율을 차용해 자신의 발라드곡 "All by Myself" 를 만들었는데요.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셀린 디온(Céline Dion)의 리메이크 버전으로도 사랑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All by Myself"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의 유명한 장면에도 삽입되어 주인공 브리짓이 자신의 외로움과 좌절을 토로하는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선율이 시대와 장르를 넘어 수많은 이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음악이 최상의 예술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 (속으로 오빠 만세 외치는 분들은 조용히... 연식이 드러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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