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선 증후군 (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18)
하준이가 처음 학교를 가던 날을 기억한다.
미국 공립학교는 Kindergarten 1년 그리고 본격적으로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총 13년 동안 학교를 다니게 되어있다. 그리고 Kindergarten 전에는 Pre-K라고 해서 일종의 유치원 개념의 교육과정을 거친다. (Pre-K 이전의 유치원과정은 모두 Pre-School이라는 개념으로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조지아주의 경우에는, 이 Pre-K 과정을 Georgia(주 정부 공립) Pre-K 혹은 Private(사설) Pre-K 이렇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사설을 보내면 조금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순 있겠지만 별도의 등록금을 지불해야 하기에, 대부분은 Georgia Pre-K를 보내게 된다. 나이 별로 정리하자면, 만 5살에 Pre-K, 6살에 Kindergarten, 그리고 만 7살에 정식으로 1학년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 글 중 하나에서 소개한 대로 하준이는 Babies Can’t Wait 프로그램에 등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Special Pre-K라는 과정을 일반 Pre-K 이전에 1년 먼저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총 2년의 Pre-K 시간을 거치는 것이었다. 이는 주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DHH(Deaf and Hard Hearing) 정책의 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준이는 그 프로그램의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져 있었고, 마침 우리 집 근처에 이를 지원하는 공립학교가 있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미국이 자국 시민권을 지닌 어린아이들의 교육과 복지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분명 한국만큼 교육열이 치열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그리고 교육기관과 교육자들 개개인의 역량을 비교해 보면 한국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수학과외로 생활을 유지하는 내 경험에서 비롯한 주관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미국은 분명 최대한 많은 아이들이 보편적인 수준의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증명하듯, 인권이슈가 잠재되어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한 편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소외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정책적인 울타리를 제공하고 정부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준이도 그런 정책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부모 스스로가 대안학교를 찾아야 하고, 타인의 따가운 시선에 부담을 덜 느낄만한 교육기관을 찾아야 하는 한국의 상황과는 조금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하준이가 배정받은 학교는 Benefield Elementary School이라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던 곳이었다. 미국에서는 지극히 짧은 거리이다. 배정받은 직후, 난 각종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다. 학교가 하준이가 다니고 있던 병원으로부터 진료기록들을 참조할 수 있게 허락하는 서류들이었다. 병원들은 빠르게 관련자료들을 다 모아서 학교로 보내주었다. 학교는 우리에게도 따로 연락을 주어 하준이의 입학 전 미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가게 된, 공립학교 건물의 내부는 겉에서 보며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단층으로 된 학교 건물은 빼곡히 늘어선 교실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 한 구석에 하준이네 교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교실을 구경하고 나온 뒤에 우리는 잠시 입학담당자와 미팅을 가졌다. 그 미팅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수업이 진행될 것이며 어떤 커리큘럼으로 아이들을 지도할 건지에 대한 브리핑을 들을 수 있었다.
설명을 들을수록 새삼 놀라게 되었다. 학교에는 audiologist(청각사)와 speech therapist(언어치료사)가 늘 상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어린아이들의 운동기술 혹은 소근육발달 등을 도와줄 occupational therapist(작업치료사)도 상주했다. 때에 따라 필요할 수 있는 협력의사들 또한 학교와 연계되어 있어서 대분의 아이들의 상황을 커버할 수 있었다. 곧 설명하겠지만, 이 모든 시스템이 단 몇 명의 학생들을 위해서 구비된 것이었다.
학교 측은 하준이와 비슷하게 귀가 잘 안들리거나 청력을 상실해서 cochlear implant surgery(인공와우수술)를 받은 아이들 8명 정도가 한 학급을 이룰 것이라 했다. 적당히 아늑하고 아담한 교실에 하준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도 담임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선생님이셨고, 8명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교실에 보조교사도 있었다. 적은 인원의 아이들이지만 세심하게 봐주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또 한 가지 놀랄만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학교 전체에 이런 학급이 오직 하준이네 반 하나였다는 것이다. 나머지 애들은 이러한 보조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은, 즉 정상적으로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어떤 한 학교만 따로 툭 떼어내서 대안학교니 농아학교니 라는 이름 등으로 그 특수성을 굳이 부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고, 청각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그렇지 않은 아이들 틈 사이에서 노출되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사회성을 익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다. 학급 이름조차도 담임선생님 이름을 따라가기 때문에, (예를 들어, Ms. Skinner's Class) 설령 하준이가 어느 학교 어느 선생님 반에 소속되어 있는지 타인이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런 특수프로그램과 관련된 학급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 모든 시스템 뒤에 배려가 숨어있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백했다. ‘더 많은 관심과 서비스를 제공하겠지만, 우린 너희를 티 나게 구별하지 않을 거야.’
그러한 배려는 IEP(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IEP란 쉽게 말해서, 학생 개개인의 발달 속도에 맞춘 교육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설령 같은 학급에 속해있고, 같은 커리큘럼으로 교과목을 배우는 중이라고 해도, 개개인에 맞춰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관찰/관리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준이와 같은 학급에 속한 모든 아이들은 모두 이 프로그램의 대상자들이었다. 하준이만 하더라도 한 달 기준 얼마나 자주 언어치료가 필요한지, 보청기 점검이 필요한지, 발음교정은 몇 회가 필요한 지, 또 학업에 있어서 언어영역과 수리영역에서 어떤 목표 점을 가지고 있는 지를 세세하게 세팅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것들은 모두 학교 내에서 제공될 것들이었다. 이를 정하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한 한기에 한 번 부모와 관련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 회의를 갖는데, 이 IEP회의가 한 번 할 때마다 보통은 두 시간 넘게 이어진다. 그 회의록이 후에 부모들에게 공유되고 회의 하나에 십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세세하다.
이렇게 제법 긴 준비 과정을 거치고, 이제 하준이가 학교에 가는 첫날이 되었다. 2018년의 어느 늦여름날이었다.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 본 모든 부모님들은 공감이 될 테지만, 아이를 내 품에서 떠나보내서 몇 시간가량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아둔다는 것이 보통 마음 졸이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당시 하준이는 4살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이 작은 아이가, 영어도 한 마디 못하는 이 작은 아이가 무사히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등교시간에 맞춰서 차를 몰고 학교에 가니, 학교에는 이미 스쿨버스를 이용해 도착한 아이들과 부모들의 차로 도착한 아이들, 그리고 그를 지도해 주는 선생님들로 북적북적한 상태였다. 우리는 장사진을 이룬 차량들 뒤로 우리 차를 이끌고 갔다. 앞을 보니, 차가 선생님들 앞에 서면 그 앞에 서있던 지도 선생님이 차문을 열고 아이들을 내려서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서서히 우리 차례가 다가왔다. 어리둥절한 하준이가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하준이가 우리 앞차에서 아이가 내려 학교 안에 들어가고 내려준 그 차가 붕 떠나버리는 것을 확인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표정. 그리고 이내 우리 차례.
다정한 얼굴의 선생님이 웃으며 우리 차의 뒷문을 열었다. 하준이는 벌써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안 내리려고 하는 하준이의 안전벨트를 풀고, (그 작고 가벼운) 4살짜리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우리에게 슬쩍 인사를 건넨 후 학교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도플러 효과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하준이의 울음소리가 들릴 뿐. 우리는 뒤차가 기다리지 않게 얼른 다시 드라이브에 기어를 놓고 출발해야 했다. 후에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하준이가 계속 속도를 내며 멀어져 가는 우리 차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침마다 반복되던 그 비명에 가깝던 울음이 점점 잦아들고, 시간이 지나자 학교에 가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준이와 같이 보청기를 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하준이와 같이 발음이 조금은 어눌하지만 밝게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매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준이의 조금 이른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린 그렇게 뛰어들게 된 무리 생활 속에서 하준이가 행복하게 적응하길 기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