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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26. 2024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세요?

나의 시간 연대기

 여러분들은 뭔가에 빠졌을 때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신비한 마법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대를 백여 일 앞둔 말년병장은 제대 날짜가 얼른 돌아오기만 바라지만, 국방부의 시계는 그저 굼벵이처럼 째애애애애액까아아아아아아아악거리고만 있다. 뭔가를 해보지도 않고 제대할 날만 초조하게 기다리다 보니 그저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이다. 이제부터 내 지난 연대기를 되돌아보며 뭔가에 빠졌을 때 체감되는 '시간의 속도'와 그에 따른 '남는 것'을 고백하고자 한다. 


생후 : 부모님과 사랑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뀨?"


남는 것 - "쀼?"


10대 : 입시 공부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럭저럭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긴 한다. 수학을 잘하진 않았지만 특히 수학 문제 풀 때는 다른 과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금방 흘러갔던 것 같다.(수능에서는 수학을 망쳤다.)


남는 것 - 금방 휘발될 교과서 지식이 남는다. 뭔가를 많이 배우긴 했지만 세상을 읽는 안목이나 세상을 이끌어갈 역량은 거의 배우지 않았다.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는 열쇠가 숨겨진 인문철학고전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대 : 관계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관계에 집착할수록 시간은 크고 작은 추억 방울들을 쏟아 내면서 바람에 흩날리듯 지나간다.


남는 것 - 관계에 집착했으니 당연히 관계가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인풋과 아웃풋이 다르다. 난 분명 90을 넣었는데 돌아오는 건 10도 안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관계를 많이 쌓은 것 같은데 진정 내 사람은 없는 느낌이다. 친구든 동료든.... 때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관계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자책의 마음이 남는다.


20대 : 온라인 게임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연비가 안 좋은 자동차를 몰고 교통체증이 심한 거리를 주행하시간은 연료처럼 빠르게 낭비된다.


남는 것 - 게임 캐릭터 경험치가 남는다. 하지만 삶의 경험치가 아닌 가상 세계 경험치다. 하등의 쓸모가 없다. 게임 캐릭터의 레벨이 높다고 세상 사람들은 동경의 시선을 보내주지 않는다. 알맹이가 없는 만족감만 남아 있을 뿐이다.


30대 : 골프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시원시원한 드라이버 처럼 시간이 훨훨 잘 날아간다.


남는 것 - 점점 줄어드는 계좌 잔고가 남는다. 티값과 캐디비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골프 실력이 수록 c.c 및 스크린 골프장 방문 횟수가 잦아진다.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개설해야 할 판이다.


30대 : 투자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심장을 바짝 조이는 서스펜스 영화를 감상하듯 시간 개념에 무감각해진다. 시계를 볼 틈도 없이 틈만 나면 투자 어플을 들여다보고 있다. 몇 시인지는 중요치 않다. 오직 종목의 등락에만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있다.


남는 것 - 갚아야 할 대출원금과 이자가 남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이 남는다.


40대 : 책 읽기와 글쓰기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시간한테 사기당했다고 느낄 만큼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되어 버린다. 저녁 7시경 책상 앞에 앉아 책 좀 보고 글 좀 썼을 뿐인데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1시를 지나고 있다. 8시, 9시, 10시를 잃어버렸다. 조금 억울하다.


남는 것 - 더욱 단단해진 지성과 평온한 내면이 남는다. 활자와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미소를 머금고 꿈을 그리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르고 설렌다.  


번외 편 :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출처 : 픽사베이

시간의 속도 - 그녀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다. 물리적인 시간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억겁의 시간 같고, 그녀를 만나는 서너 시간이 불과 삼사초처럼 여겨진다.


남는 것 - 청춘 시절에 불태웠던 뜨거운 사랑의 장작이 이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숯불더미로 남아 있다. 쉬이 꺼질 것 같지 않은 *야나르 다그처럼. 내 곁엔 그녀와 사랑스럽기만 한 두 아들과 복된 가정이 남았다.


*야나르 다그 : 아제르바이잔의 관광지. 화산성 가스로 인해 지속적으로 불타는 자연 현상


시간은 마치 내 귀중품을 훔쳐서 달아나는 소매치기와도 같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지 말고 소중한 걸 되찾기 위해 붙잡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 물론 전속력으로 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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