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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Oct 31. 2015

고양과 고양이 (하)

“이봐 고양, 내가 시킨 심부름은 끝냈나? 오늘따라 왜 그래.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상사의 불호령에 정신을 차린 여자는 죄송하다고 수차례 사과를 하곤 심부름을 하기 위해 외근 준비를 했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는데 건너편에서 할머니 한 분이 전단지를 한 아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신호등을 건넌 여자가 할머니가 붙여놓은 전단지를 바라보았다. 우리 강아지를 찾습니다. 자식 같은 녀석이니 찾으신 분은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덧붙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파지를 주우시는 할머니였다. 목줄을 놓아도 도망간 적 없는 강아지였는데 끝내 사라진 모양이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 의지할 거라곤 그 강아지뿐이었던 것처럼 여자에겐 ‘고양이’뿐이었다. 삶의 전부를 잃어버린 할머니가 파지 줍는 것도 포기하고 온종일 돌아다니며 강아지를 찾아 헤매는 모습에 문득 집에 남겨진 ‘고양이’가 생각났다. 요 며칠 바빠서 소홀히 대해 동물병원에 데려가려다 관둔 일이 떠올랐다. 거래처에 들려 서류를 받아와야 했지만 여자는 충동적으로 상사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신경질적인 상사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미쳤어? 거래처에서 언제 올 거냐는데 대체 뭐 하는 거야?”

여자는 상사의 물음은 듣지도 않고 오늘 반차 쓰겠습니다, 하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온 여자는 현관문이 닫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알람이 꺼진 것도 모르고 자느라 ‘고양이’와 인사할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나왔는데 문단속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고양이’를 불렀다. 그러나 집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괜한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킨 여자가 다시 ‘고양이’를 불렀다. 멍멍아,라고 해도 양이야,라고 해도 집안 그 어느 곳에서도 멍멍-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자는 괜찮을 거야, 라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고양이’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되뇌었다. 거실과 부엌에선 ‘고양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방 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긴 침묵을 뚫고 여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사의 전화였다. 여자는 당황해서 눈을 굴리며 다시금 집안을 헤집었다. 15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엔 가구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숨바꼭질을 해도 숨을 곳이 없는 이 곳 어디에도 그녀의 ‘고양이’는 없었다. 시끄러운 벨소리가 메아리처럼 윙윙 울리는 듯했다. 얼떨결에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가 난 상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사는 계속해서 고양-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상사가 자신을 부르는 건지 자신의 강아지를 부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할머니가 붙인 강아지 전단지가 오버랩되었다. 어디선가 물 끓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금 상사가 눈앞에 있었더라면 저 끓는 물을 부었을지도 모르는데,라고 생각하던 여자는 수화기 너머의 고함을 무시한 채로 서둘러 맨발로 현관문을 나섰다.


여자는 정신없이 아파트 놀이터와 공터를 헤맸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마주쳤던 여자 아이와 그 또래 친구들이 모여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얘들아 혹시 ‘고양이’ 못 봤니? “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까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에 고양이가 있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자신이 잘못 질문했다는 걸 깨닫고 강아지는 못 봤냐며 되물었다. 갈색 치와와인데 크기는 이만하고... 설명을 하는 와중에 아이들의 얼굴엔 의아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강아지와 고양이라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여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강아지를 찾는다는 거예요? 고양이를 찾는다는 거예요?”


설명하기를 관둔 여자는 차라리 전단지를 만들자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전단지를 만들어서 돌리면 금방 근처에 있던 이가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쇄업체에 전단지 인쇄를 맡긴 후 거리로 나선 여자는 전단지를 떼고 있던 파지 줍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강아지를 찾았냐는 물음에 알아서 잘 지내겠거니 생각하려고,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젠 놀라서 가슴이 벌렁거렸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가 갈 때가 됐으니 알아서 간 거겠지 싶어. “

여자는 각자 제 운명대로 사는 거야, 라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자는 전단지를 붙였다. 엄마는 엄마대로 살아도 여자는 고양이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록 누구에게서도 ‘고양이’를 봤다거나 데리고 있다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달이 지난 뒤에야 여자의 일상은 안정을 되찾았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그 날 여자는 사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연락을 들었다. 별로 감흥은 없었다. 상을 받았다고 해도 축하해 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사는 권고사직이라도 언급할 줄 알았건만 화내는 대신 수고했다고 공모전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가 겹친 것 같으니 원한다면 하루 더 쉬라고 말했다. 어쩌면 산발에 맨발에 피가 난 채로 회사로 돌아간 여자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서 그러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짐작컨데 그 뒤로 상사가 여자에게 업무를 시키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다. 아마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자에게도 후배가 생겼다. 온갖 잡일은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넘어갔다. 이전보다 훨씬 수월한 업무를 맡게 되었지만 여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이 일하고 거의 매일을 야근으로 보냈다. 빈 집에서 혼자 라면을 먹고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나는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출근길에 새로 생긴 동물가게에서 유리 칸막이 너머로 몇 종류의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한가롭게 잠에 취해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에서 ‘고양이’도 저렇게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자는 새 동물을 데려오는 대신 종종 아파트를 배회하는 길고양이에게 간식을 챙겨줬다. 몇 번 먹이를 챙겨주자 고양이는 여자를 볼 때마다 졸졸 쫓아다니며 야옹-거렸다.  부녀회장은 이제 들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지 말라며 여자를 나무랐다. 아파트에 점점 고양이가 늘어난다는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는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길들여서 데리고 들어가 살든가! “

여자는 전과 달리 우리 입장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냐, 는 부녀회장의 말에 수긍했다.


파지 줍는 할머니에게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할머니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한 이후 고양이들은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부녀회장은 파지 줍는 할머니 덕에 고민거리가 사라지자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감사하다며 자기 집에서 가져온 박스 묶음을 건넸다. 이전에 강아지가 그랬던 것처럼 고양이들은 파수꾼처럼 할머니 주위를 배회했다. 어떤 날은 얼룩무늬 고양이와 함께였고 또 다른 날엔 황갈색 고양이와 함께였다. 고양이들은 가끔씩 할머니의 파지 더미 위에 얌전하게 앉아 고고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휙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할머니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고양이들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는 여자가 어느 날처럼 택배 박스들을 건네자 고맙다며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는 말없이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여자도 너덜너덜한 전단지를 수거했다. 라면 대신 인터넷을 통해 요리를 배운 여자는 인스턴트를 끊었다. 강아지 용품이나 사료는 반려견을 키우는 회사 직원에게 넘겼다. 여자에게 강아지가 있었다는 이야길 들은 직원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고양에게 ‘고양이’라는 강아지가 있었다니. 세상을 혼자 사는 것처럼 철저해 보여서 애완동물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여자가 ‘고양이’를 완전히 놓아주었을 즈음 전화가 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였는데 늦게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더불어 여자의 ‘고양이’를 데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번 ‘고양이’를 잃어버렸을 때 놀이터에서 만났던 여자 아이의 부모였다. 아이가 하도 보내지 말라고 떼써서 그냥 키우다가 미안한 마음에 이제서라도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사과하는 그녀의 말에 여자는 잘 지내면 됐다며 잘 키워달라고 말했다.


 그 무렵 발신번호 제한으로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나 재혼해.


근 두 달 만에 온 연락이었다. 엄마다운 말투였다. 의붓아버지를 처음 소개해줬던 때에도 엄마는 나 재혼해,라고 말했었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 알아서 살자는 엄마의 신조가 이처럼 잘 드러났던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애초에 발신번호도 없이 보내온 문자였다. 여자의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여자도 딱히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었다. 엄마는 엄마였고 그녀는 그녀였으며 ‘고양이’는 ‘고양이’니까.


Copyright. 2014 이소. All Rights Reserved

대학생일 때 학교 신문사의 소설 공모전에서 당선되었던 작품인데 저에게는 뜻깊은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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