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리는 이유와 달리기를 통해 배운 것들 4
10km 마라톤을 끝마치고는 당일 저녁 나는 다시 부대로 복귀하였다. 밤에 생활관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으니, 오전에 있었던 마라톤 대회의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머나먼 날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다음날 나는 의무실에 가서 같은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군의관과 전날의 경험과 감정들을 공유하며, 우리들이 애초에 계획하였던 마라톤 여정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나의 전역 한 달 전인 10월에 같이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이었지만, 전날의 퍼포먼스를 보니 좀 더 일찍 하프마라톤에 도전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4월 30일에 있는 ‘서울 하프마라톤’에 같이 출전하기로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하프마라톤 접수를 하였다. 4월 30일까지 남은 기간은 대략 한 달 남짓. 지난 대회의 거리보다 두 배가 넘는 거리를 달려야 했기에, 매일 뛰는 거리를 늘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남은 40일 동안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10km를 뛰고 대회 전에 부대에서 15km 와 20km를 한 번씩 뛰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계획대로 매일 뛰던 도중 나는 나의 아디다스 러닝화 신발의 밑창이 많이 닳았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과는 다르게 충격이 발목과 정강이로 전달되어 발목과 정강이 부분이 많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꼈고, 이 신발과 같이 매일 장거리 달리기를 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는 처음으로 러닝화를 구매하기로 하였다. 러닝화에 관하여 아무 지식이 없던 나는 평소 러닝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있던 군의관에게 러닝화를 추천받았고, 그렇게 추천받은 운동화는 아식스 ‘노바 블라스트 3‘ 였다. 웹사이트에서는 전부 품절 상태였기 때문에 온라인 구매가 불가능한 상황인지라 직접 가서 구매해야 했다. 부대에서 가까운 춘천에 제법 큰 규모의 아식스 매장이 있다는 것을 군의관에게 듣고는 다음 휴가에서 복귀하는 길에 춘천 아식스 매장에 방문하였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다른 런닝화 따위는 쳐다보지 않고 바로 ’노바 블라스트 3‘를 집어 든 다음에 사장님께 270사이즈가 있는지 여쭈어보았다. 천만다행히도 사장님께서는 마침 270사이즈가 딱 하나 남아있다면서 부리나케 러닝화를 꺼내오셨다. 실물을 직접 보니 어서 한번 신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잽싸게 군화를 벗고, 러닝화를 착용한 후 신발 끈을 묶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매장을 한바퀴 걸어보았다. 나는 발을 앞으로 살짝 내디뎠을 뿐인데 발이 저절로 굴러갔다. 높은 미드솔 때문인지 나는 마치 매트리스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탱탱한 느낌의 쿠션감도 좋았다. 나는 그 순간 사람들이 왜 달리기를 위하여 러닝화에 많은 투자를 하는지 깨달았다. 이 운동화와 함께라면 훨씬 더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새 러닝화를 가방에 고이 모신 채로 부대로 향하였다.
부대에 도착하여 새로운 러닝화를 신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부대 10km를 뛰어보았다. 새 러닝화의 통통 튀는 느낌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어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을 뿐인데 발이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였다. 이미 여러 차례 10km를 완주한 터라, 부대에서의 10km 달리기는 더 이상 벅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새 러닝화 덕분인지 오히려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진짜 ’첫 러닝화‘를 신고 부대를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4월 2일. 부대에서 뛴 최장 거리를 갱신하였다. 뛴 거리는 15.38km. 1km에 5분 32초 페이스로 1시간 25분 동안 부대를 달렸다. 나의 첫 15km 달리기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하프마라톤을 충분히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매일 5km 달리기와 중간에 10km 달리기를 적절히 섞어주면서 나의 첫 하프마라톤을 준비하였다.
4월 9일 저녁 7시 30분. 영상 11도의 선선한 날씨. 너무나도 달리기 좋은 날씨와 컨디션이었다. 이날 나는 20km를 한번 달려보기로 다짐했다. 예전에는 달려본 적이 없는 거리를 달린다고 하면 지레 겁부터 먹으며 걱정이 앞섰었는데 이제는 그냥 설렜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보다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강하게 들었다. 장거리 달리기를 위하여 이온 음료를 3캔 준비하여 부대 중간에 있는 벤치에 올려둔 뒤, 나는 나의 첫 20km 달리기를 시작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10km는 매우 순조로웠다. 평균 1km에 5분 25초 정도의 페이스를 꾸준히 유지하며 부대 스무 바퀴가량을 돌았다. 10km를 달린 뒤 아까 벤치 위에 올려둔 이온 음료 캔 뚜껑을 따 수분을 보충한 뒤 다시 달리기 시작하였다. 15km까지도 페이스를 꾸준히 유지한 채 달렸다. 16km. 여기서부터는 왼쪽 발목에 통증이 약간 느껴지기 시작했고, 허벅지도 땡기기 시작하였다. 18km. 발목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약간 경사진 길을 올라갈 때면 통증은 더욱 심해져, 최대한 오른발에 힘을 실어 내딛으려고 노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왼발의 엄지발가락이 계속 신발 앞에 닿으면서 발가락의 통증도 더해졌다. 고통은 점점 더 심해져 갔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20km 완주를 하지 못하고 여기서 포기하면 대회 전에 20km를 다시 달릴 기회가 없을 것만 같은 생각에 오늘 꼭 완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좀 더 빠른 비트의 음악으로 변경하고 볼륨을 최대로 높여, 나의 신경이 통증으로부터 멀어지게끔 하였다. 19km. 발목과 발가락은 여전히 아파왔지만 1km 남긴 지점에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 1km는 심한 통증 때문에 마치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는 좀비와 같은 형상으로 달리기를 겨우 이어나갔고, 마침내 20km 달리기를 완주하였다. 20km를 달렸다는 안내 음성이 이어폰으로부터 흘러나옴과 동시에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달리기를 멈추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발목과 발가락의 통증이 온전히 느껴졌다. 나는 절뚝거리며 이온 음료를 두었던 벤치로 걸어가, 목을 축이며 기록을 확인하였다. 1시간 48분 58초. 10km에 54분꼴로 뛴 셈이다. 생각보다 꽤 잘 뛰었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하프마라톤을 2시간 이내에 완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다가, 샤워를 하고 생활관으로 올라가 왼발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왼발의 엄지발가락 발톱은 멍이 들어 검게 변해있었고, 양발은 심하게 부어있었다. 왼쪽 발목의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이대로 계속 달리기를 하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주일가량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며칠을 쉬고 나니 발목의 통증은 조금 완화되었고 일주일 뒤 나는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4월 16일, 19일, 23일, 26일 이렇게 3~4일 간격으로 10km씩 뛰면서 하프 마라톤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4월 26일의 10km 달리기 후 나는 왼쪽 발목에 다시 심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대회 전까지 남은 3일 동안은 그냥 쉬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첫 마라톤 때와는 다르게 나는 불완전한 몸 상태와 함께 나의 두 번째 마라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