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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아빠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by 박정욱

사랑은 잔소리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우리 딸들에게 건네는 수많은 말들이 오간다. 그 많은 말들 중에는 불편한 형태로 건네는 말들이 있다. 잔소리, 훈계, 경고, 때로는 화난 얼굴로. 내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그런 모습이다. "양치했어?", "말 좀 들어",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추워", "자야 할 시간이야", "뛰지 마" 이런 말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 귀찮고 듣기 싫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의 뿌리는 하나다. 걱정. 아이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실수에서 배워갔으면 하는 바람. 나 스스로가 알게 모르게 늘 그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 마음은 말로 다 담을 수 없기에 자꾸만 넘친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마음속에 쌓아둔 걱정이 퇴근과 동시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아이가 문득 기침을 한 번 하면 다음 날 병원 예약을 고민하고, 넘어질 듯한 모습을 보면 심장이 먼저 철렁 내려앉는다. 그런 순간마다 '조심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자동처럼 튀어나온다. 표현 방식은 거칠지만 감정의 본질은 거칠지 않다.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순간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미래까지 염려하게 되는 일이다. 아이가 단지 오늘을 무사히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한다. 그래서 말을 아끼지 못한다. 잔소리가 말보다 마음이 앞선 결과라는 것을 아빠가 된 후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정작 그 마음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아이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눈빛은 멀어진다. 사랑은 그렇게 전달되지 않을 때,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더 조심스러워진다. 말 한마디가 아이의 하루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를 향해 움츠러들거나, 피하려는 눈빛을 보일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의 사랑이 과연 아이에게 닿고 있는가, 혹시 상처가 되어버린 건 아닌가.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말이 정말 필요한가?', '사랑으로 포장된 강요는 아닌가?' 마음이 앞서는 순간일수록, 오히려 더 침묵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늦게야 배운다.


아이는 말보다 표정에 반응한다
아이들은 말보다 표정에 먼저 반응한다. 짜증 섞인 목소리, 날카로운 눈빛, 다급한 발걸음. 그 모든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아이의 마음을 먼저 흔든다. 그래서 잔소리는 내용보다 분위기로 더 오래 남는다.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니라, 그때 아빠가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아이는 부모의 얼굴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내가 어떤 표정으로 아침을 맞이했는지, 어떤 얼굴로 퇴근 후 문을 열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런 표정 하나하나가 아이의 정서가 된다. 웃는 얼굴보다 인상을 쓴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되면 아이는 세상을 그렇게 배운다.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얼굴이다. 그래서 아빠로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다짐하게 된다. '오늘은 더 부드러운 얼굴로 아이를 맞이하자.' 그 작은 다짐이 쌓여 아이의 기억이 된다는 것은 매번 되새긴다.


사랑을 가장 못하는 사람이 사랑을 제일 많이 한다
나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좋아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서툴다. 어색한 칭찬보다 손쉬운 지적을 택하고 대화보다 지시를 선택한다. 하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 표현이 서툴 뿐이다. 우리 딸들에 대한 사랑을 깊게 느끼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더 불안하고, 그래서 간섭하게 되고, 그래서 잔소리가 많아진다.

나는 종종 내 아버지를 떠올린다. 무뚝뚝하고 말수 적던 그분이 내게 건넸던 "밥 먹고 다녀라." 그 말이 내가 받은 첫 번째 사랑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그 한 마디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말하게 된다. 무뚝뚝하고 거칠고 지겨운 나의 잔소리들 속에는 내 마음이 있다. 부전자전이라고 나도 나의 아버지와 똑같다. 사랑 대신 걱정을 말하는 아빠의 방식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아이의 말투에서 나의 모습이 비친다. 아이의 표정에서 나의 감정이 떠오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아이가 움츠러드는 순간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나도 자란다. 잔소리를 멈추는 대신 설명하려 애쓰고 지적 대신 공감하려 노력하게 된다. 하루하루 아빠로서의 감각을 익히며 나는 조금씩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다.

그 변화는 말보다 일상에서 느껴진다. 아이가 내 눈치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해 나도 먼저 감정을 다스리려 한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내 표정부터 점검한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짜증이 났을 일에도 이제는 한 박자 쉬고 반응하려고 한다. 아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래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키우는 일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진심이 아빠라는 이름 아래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실수를 반복하며 배운다
나는 자주 실수한다. 생각보다 더 많이, 너무도 자주 실수한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배운 낡은 기준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지금과 맞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 딸들에게 말하거나 나도 모르게 구시대적 사고를 우리 딸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말하고 난 후에야 스스로 놀란다. 이건 아닌데, 이건 너희에게 더는 통하지 않는데. 하지만 말은 이미 나왔고 아이의 눈에는 그 말이 각인된다. 그때마다 뒤늦은 후회를 반복한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도 많다. 피곤함을 핑계로, 스트레스를 이유로, 나는 짜증을 낸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탓하면서도 다음 날 또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알고 있음에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나는 아빠가 되었어도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보여주는 증거다. 아이 앞에서는 어른이어야 하지만, 어른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또 아빠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나는 여전히 배우는 입장이다.

그래서 염치없지만, 이해를 구하고 싶다. 아빠도 사람이고, 너무도 모자란 사람이라서, 우리 딸들에게 때때로 상처가 될 수 있는 언행을 하게 된다. 그것이 아빠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매번 후회와 반성 속에서 되새기고 있다는 것을 우리 딸들이 언젠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아빠도 너희와 함께 성장해가고 있다는 걸, 너희가 언젠가 느껴줬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야 이해되는 마음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내 아버지의 말들이 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예민했는지, 왜 작은 일에도 그렇게 단호했는지 몰랐지만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때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아이가 자라고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그제야 이해된다. 나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자주 잔소리를 했는지를 스스로가 아빠가 되어서야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뒤늦게 선명해진다. 나 또한 어른이 되어서야 부모님의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들의 말투, 눈빛, 손길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뒤늦게서야 읽게 되었다. 우리 딸들에게도 그 시간이 올 것이다. 지금은 그저 귀찮은 말들로 들리겠지만, 언젠가 일상에서 문득 떠오를 것이다. 그때 그 말이, 사실은 사랑이었구나 하고 깨달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도 말한다.
"늦기 전에 자라", "너무 오래 보지 마라", "밥 먹어". 사랑은 오늘도 잔소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직은 우리 딸들이 그 진심을 알아채지 못해도 괜찮다. 지금은 그저 잔소리로 들려도, 언젠가 문득 그 말들이 모두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리 딸들 곁에 머문다. 실수하더라도, 오해받더라도, 그 자리를 지킨다. 시간이 흘러 우리 딸들이 성숙하게 어른이 되었을 때, 이 모든 말과 표정과 시간이 하나의 사랑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그 바람 하나면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기억 속의 아빠가 따뜻한 사람이었기를, 그 마음 하나로 오늘도 아이 곁을 지키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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