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 기타 좀 치는 사람입니다

초보자의 무덤, 황혼을 완주하다

by 쿼카의 하루

핑거스타일은 기타로 베이스와 멜로디 그리고 리듬을 동시에 연주하는 주법을 의미한다. 나는 고등학생 때 핑거스타일 연주곡을 처음 접했다. 대중 가요, 그 중에 특히 2세대 걸그룹과 아이돌의 등장으로 티비 음악 방송을 틀으면 너나 할것 없이 춤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과 춤은 원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당시에도 리드미컬하고 보컬 파트의 압박이 없는 곡이라면 못해도 안무는 기본으로 들어갔다. 김종국같은 애절한 보이스의 가수도 애인이 사랑스럽다면서 복잡하고 재빠른 안무를 구사했던 시절이다. 나는 학생때만 하더라도 점잖고 정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가수들의 춤판이 보이면 동공이 흔들리며 괜히 날선 시선으로 바라 봤다. 나는 춤이라면 내가 추지 않고 남이 추는 걸 보고 있어도 낯간지러워었다.





그렇다고 소위 ‘실력파‘ 가수라고 불렸던 발라드도 처음엔 열심히 들었지만, 어느새부턴가 시들해졌다. 빤한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넋을 놓고 슬픈 감정을 이입하게 만들었던 뮤직비디오도 항상 누군가가 영문도 모르게 죽거나 자동차가 도랑에 빠져 불타는 장면이 예외없이 등장하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자 금새 김이 샜다.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엔 저마다 똑같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노래였다고 생각했다. 사랑 타령, 이제 지겹지도 않나. 고등학이던 나는 당시 그렇게도 사랑 이야기가 식상하고 지겹게 느껴졌다.



확실히 그땐 무언가 신선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무렵에 나는 기타를 매우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고, 다른 목적은 없이 그저 재밌어서 기타를 연주했었다. 처음으로 핑거스타일 주법의 연주곡을 듣게 된 것은 네이버 카페의 핑거스타일 카페였다. 당시 핑스카페라고 불리던 가상공간의 비지엠으로 흘러나왔던 것은 오시오 코타로의 황혼이라는 곡이다. 황혼을 듣고서 꼭 이 곡을 치고 말리라 생각했다. 당시 대중 가요에서는 느끼지 못한 기품과 아우라가 느껴졌다.


https://youtu.be/csWR2oQzylQ?si=TOk_Heug_BaiWGAM


곡의 구성도 매우 세련되었다. 계속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여러번 듣고, 악보를 프린트해서 파일에 꽂았다. 검은 잉크 냄새는 묘하게 진지한 마음을 자극했다. 나는 악보를 보는 법을 느리게 익혀가며 조금씩 연습했다. 바닥에 파일을 놓고 구부정한 자세로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빠질듯 했다. 진도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진행되었다. 그래도 조금씩 연주가 가능해졌고, 원곡으로 듣기만 한 것을 직접 손으로 카피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희열을 줬던 것 같다.




길이가 4분 정도 되는 황혼을 끝까지 완곡하기까지의 과정을 같은 반 친구인 k와 함께 했다. 조금씩 진도를 나가서 완곡에 가까워지는 황혼을 연주하는 것을 k가 처음 들었을 때 k는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아지트같았던 기타 동아리방에서 나의 아직은 엉성한 연주를 듣고 k는 감동을 받아 부모님을 졸라 자신의 기타를 사기에 이르렀다. k는 그 이후로도 동아리방을 자신의 연습실삼아서 점심 시간마다 기타를 연습했다. k는 내가 황혼을 연주할 때마다 남몰래 라이벌 의식에 불을 지폈던 것 같다. 결국 k는 내가 황혼을 완주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서 방학때 특훈을 하고 돌아와 황혼을 (그의 표현으로) '마스터'한다. k가 방학 때 공부는 제쳐두고 기타만을 연습한 결과였다. k의 파죽지세에 물론 기뻤지만 내 마음은 묘하게 공허했던 게 기억난다.


k는 또다른 친구인 p에게 전염시켰고, 그 불길은 반 전체로 퍼졌다. 얼마 가지 않아서, 나의 기타는 우리 반의 나름 명물이 되었다. 담임선생님도 기타하면 쿼카를 떠올릴 정도이니, 나는 소위 말해 기타 좀 치는 손재주 좋은 친구로 모두들 마음속에 남게된 셈이다. 굉장히 뿌듯했다. k의 나름 치열했던 라이벌 의식도 나를 '기타 좀 치는 애'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했었다. 덕분에 선천적으로 외톨이 성향이 다분한 내가 고등학교때 사교적인 친구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알게 되었던 것은 황혼은 기타 입문자에게 추천되는 연습곡인 동시에, 초보자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난도를 자랑하는 곡이라는 것이다. 핑거스타일 열풍이었던 당시에도 황혼을 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실제로 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몇 없었다고 한다. 경쟁이라는 것은 안 좋은 면이 많지만, 이럴 때 만큼은 모두에게 이로운 것 같다. 덕분에 k는 고등학생 때 경험을 바탕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베이스와 기타 연주를 취미로 삼은 건전한 아저씨가 되었다. 나 역시도 사실, 황혼을 들으면 그때 생각에 마음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황혼의 첫 마디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치열했던 학창시절의 시간들로 데려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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