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일하던 날이었다. 출근을 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승을 하려면 보통 15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던 것 같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나에게 설렘으로 다가왔다. '조화로운 삶'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맞추어 온 버스에게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버스 계단을 오르면서도 빨리 책을 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텅텅 빈 버스에 자리에 앉자마자 펼쳐든 책은 나를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고 넉넉한 삶으로 데려갔다.
거의 12년 전 출근길인데도 그날의 체취, 햇살의 내음, 차갑고도 따스한 공기와 함께 마음에 스며들던 책의 향기가 마치 어제 일인 듯 선명하다.
책의 저자인 스콧 니어링은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로 활동하면서 대공황 이전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 도시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문제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놀랍지 않게 그는 주류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학계에서도 결국 배제당했다.
미국의 대공황을 겪으며 사회가 겪은 파산은 그의 신념이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그와 그의 아내 헬렌은 자본주의 경제에 휘둘리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위해 깊이 고민하고 철저히 계획하여 20해에 걸쳐 철저히 실행해 나간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책'의 묘미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 책을 쓴 저자와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서양 문명이라는 것이 자기 지시에 충실히 복종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람을 가져다 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다'는 대목에서는 가족과의 화목한 시간을 희생하고 일자리에 뛰어들어 돈을 버는 많은 가정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장에서는 건강을 생각한다면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장을 보는 모습을 어색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그가 세운 삶의 12가지 원칙들 중 '집 짐승을 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읽으며 동물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가 꼼꼼하게 기록하고 일해서 얻은 풍요로운 농작물 혹은 꽃들을 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넉넉한 모습을 보며 텃밭을 가꿀 꿈을 꾸게 되었고, 멋진 벽난로가 있는 집을 손수 모은 돌로 지은 기록은 나무가 타는 화롯가에 앉아 차를 마실 물을 끓이고 있는 내 모습을상을 해보게 하였다.
그들이 하루에 4시간 땀흘려 일하고 오후에는 글쓰기와 여가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는 기록을 보며 자본주의 경쟁 체제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그려보게 되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건강하게 살며 사회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택 융자금으로 빌린 돈이 안락한 보금자리를 주는 듯 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하고 아끼며 모은 돈의 상당 부분이 은행과 자본주의의 폭리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과연 조화로운 삶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돈은 사도 안사도 되는, 탐닉할수도 절제할 수도 있는 사치품과 같은 것인데 더 이상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돈이 목적이 되어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12년 전의 나는 한 남자와 미래를 꿈꾸며 언젠가는 니어링 부부처럼 자연을 벗 삼아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면, 이제는 그 남자와 가정을 이루어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두고 더욱더 조여 오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조화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혼란 따위 말고 단순함을 추구하고자 했다. 병처럼 미친 듯이 서두르고 속도를 내는 것에서 벗어나 평온한 속도로 나아가고 싶었다.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 걱정과 두려움, 증오가 차지했던 자리에 평정과 뚜렷한 목표, 화해를 심고 싶었다." -조화로운 삶 中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앞으로 살아갈 나의 삶에 대하여.
백 마디의 좋은 말을 들려주는 강연보다 스콧 할아버지의 농기구 창고를 한번 둘러보는 것이 나아게는 더 큰 울림을 준다. 하나라도 빠지면 금세라도 알 수 있는 제 자리가 있는 기구들, 매일 일을 마치고 씻어서 거적을 덮어둔 수레, 해다마 기름칠을 해둔 삽, 삽 옆에 있는 내일 일을 위해 저녁에 잘 갈아둔 도끼까지.
찬찬히 둘러 보고 있는 내게 그가 말하는 것 같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나씩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네가 계획하는 삶이 하나로 모아지는 기쁨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이 책을 꺼내 들면 그의 창고의 농기구들처럼 어지러운 상념들이 하나씩 자리를 찾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하다.
이제는 12년을 넘게 알고 지낸 벗처럼 느껴지는 그가 더 친근하고 내 곁에 있는 것이 참 감사하다.
그는 내게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의 현실판이 아닐까 싶다. 일평생 자신의 신념을 묵묵히 지키고 삶을 살아낸 사람. 몸은 노쇠해도 눈빛만은 여전히 반짝이는 산티아고와 스콧 니어링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내게 말하는 듯하다.
너도 네가 꿈꾸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