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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의 후손들은 역시 다르네

Lạc Long Quân st.|한국에는 단군, 베트남에는 락롱꿘

by 예스혜라 Mar 07. 2025

 


 하노이 겨울의 습도는 최악이다. 제습기를 하루 종일 돌려도 그 수치가 50밑으로 내려가질 않는다. 제습기를 방마다 한 개씩 돌리는 집들도 많다. 지난 일요일에 세탁해두었던 현우의 낮잠이불이 다음 날 아침까지도 완벽하게 마르지 않아서 대충 집에 있는 다른 이불을 유치원에 챙겨보냈다.

 문제는 빨래만이 아니다. 이런 날이 오래 지속되면 한 번씩 옷장 속의 가죽 옷이나 가죽 가방을 확인해야 한다. 9년 전 하노이에 입성하면서 멋 좀 부려보겠다고 한국에서부터 가죽 재킷, 가죽 가방들을이고 지고 왔었는데 곰팡이가 피어 죄다 갖다 버렸던 기억이 난다. 베트남으로 딸을 떠나보내놓은 친정엄마는 한국에 와서도 주야장천 에코백만 들고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제대로 된 가방 하나를 사주겠다고 말한다. 이럴 때는 또 곰팡이가 좋은 핑계다. 엄마,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사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높은 습도 탓에 하노이의 대부분 집은 도배대신 페인트칠을 택한다.


 

 기온마저 뚝 떨어진 오늘 새벽 공기는 유난히 더 무겁다. 대부분의 국제 학교가 오전 8시면 시작이라 유주 현우의 기상시간도 많이 이른 6시 40분인데 요즘은 현우가 부쩍 일어나기 힘들어한다. 그래, 어른인 나도 힘든데 세 돌 갓 지난 너는 얼마나 더 힘들겠니. 이런 날은 특별히 자차 등원 서비스다. 왜 특별한 서비스인지는 이 나라에서 출퇴근 시간에 단 한 번이라도 직접 운전을 해본 사람이라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드라이브 음악은 사치다. 운전하는 내내 등허리에 긴장 한 번 풀지 못한 채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토바이 부대를 뚫는다. 후, 7:55AM 등원 세이프!



늘 닿을 듯 말듯한 오토바이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를 기다리는데 창밖으로 용 조각상이 보인다. 서호(Tay Ho) 왼쪽 동네의 시그니처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쌍용 조각상은 9년 전부터 오며 가며 자주 마주쳤던 것이다. 흐림 필터를 씌운 듯한 시야 속의 저 용들의 눈알이 오늘따라 더 쳐져 보이는 것이 많이 피곤해 보인다. 하긴 쟤네들도 우중충한 하늘로 승천하고 싶겠어? 나도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더니 달달한 밀크티 한 잔이 간절하다. 귀가는 잠시 미루기로 하고 쌍용 조각상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보이는 롯데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래간만에 스타벅스 대신 로컬 카페를 찾아가고 싶었다. 아까 차로 오면서 지나쳤던 카페들이 왠지 느낌 있어 보였단 말이지.



하늘도 호수도 용도, 뭐 하나 파란 것이 없는 날



 롯데몰에 차를 주차해두고 조금 전 차로 달려온 길을 다시 걸어서 되돌아갔다. 하노이 살면서 셀 수도 없이 밟았던 이 길의 이름은 락롱꿘(Lạc Long Quân)으로 베트남 건국 신화와 관련된 용왕 아들의 이름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단군에 대하여 자세히는 몰라도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락롱꿘도 베트남 사람에게 그런 신화적 존재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락롱꿘을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실제 역사적 인물로 아직도 믿고 있다고 한다. 


 락롱꿘의 이야기를 간단히 풀어보자면, 용왕의 아들인 락롱꿘은 산속의 요정인 어우꺼(Âu Cơ)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어우꺼는 100개의 알을 낳았고, 알에서 나온 100명의 아들은 단 하루만에 건장한 청년들로 자란다. 100명의 아들중 50명은 어머니인 어우꺼를 따라 산과 숲을 방어하고, 나머지 50명은 아버지인 락롱꾸언과 함께 강과 바다를 다스리게 된다. 훗날 락롱꿘은 바다로 돌아가기 전에 왕위를 장자에게 물려주는데, 그가 바로 베트남 최초의 고대국가인 반랑(Văn Lang)의 훙꾸옥브엉(Hùng Quốc vương)이라는 왕이다.

 암기보다는 이해하는 쪽을 택하겠다며 이과를 택했던 이 엄마는 락롱꿘의 신화를 읽는데 왜 머릿속에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만 기억에 남을까. 알에서 태어난 것까지는 뭐 나도 비슷한 계통이라 할 말이 없는데 100개라니.. 자긍심 하나는 끝내주는 민족이다.



락롱꿘 길에 위치한 서호 웨스트레이크 롯데몰 / 락롱꿘 길




 30분 정도를 열심히 걷다 보니 화장실이 급하다. 근처에 들어갈만한 카페들을 재빨리 스캔하는데 왠지 카페 안 저 소파 속에 채워져있는 것이 솜만이 아닐 것 같다. 안되겠다 오늘은 일단 쾌적한 롯데몰로 후퇴. 그나저나 축축한 이런 날씨에도 노상 커피를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 대단하다. 그것도 오토바이 쌩쌩 지나다니는 호숫가 바로 옆에서. 역시 용왕의 후손들답다.



락롱꿘 바로 옆의 호숫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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