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시작은 어떤 말로 해야 하는 걸까. 글 쓰는 법 같은 건 배워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꿨지만 정작 내가 선택한 길은 이과를 배우고 취업하는 것이었다. 별 대단한 꿈이 있던 건 아니다. 그저 글을 쓰는 것보다 수학 문제를 푸는 데에 재능이 있었을 뿐. 아니,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책은커녕 글조차 마음껏 써본 적이 없으니, 재능을 운운하기엔 작가란 꿈의 첫 발걸음조차 떼본 적 없다. 재능이 있어도 성공하기 힘든 길과 확실하게 먹고살 수 있는 길 중 내가 택한 건 후자였다는 아주 흔한, 그리고 뻔한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난 꿈을 가슴속 깊은 곳에, 눈에 보이지 않도록 아주 깊은 곳에 고이 묻었다.
목표 없이 걷던 아이는 스물하나가 되었다. 인맥, 여자, 돈이 세상의 전부인 나였다. 무언가 잘못됨을 깨달은 건 군대에 들어간 후였다. 세상과 단절된 훈련소에서 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전교에서 몇 등, 어느 대학의 누구,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홀 몸으로 남겨진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내 발걸음에 의미 따윈 없는 듯해 보였다. 그렇게 공황장애, 우울증에까지 시달리게 된 나는 내 안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기 위해 내 가슴속을 헤집었다. 그때였다, 오래전 묻어둔 꿈을 다시 찾게 된 건.
너무 늦게 다시 찾아버린 꿈에 메여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더는 후회하지 않을 거란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오랜만에 책을 펼쳤고, 닥치는 대로 떠오르는 말들을 적어 나갔다. 이제는 안다. 그 순간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극심한 불안함에 녹아버린 머릿속과 터질듯한 가슴,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던 손발을 이끌고, 내가 찾아낸 게 무엇인지를 안다. 글 쓰는 법을 배운 적은 없음에도, 나는 여기에 정제되지 않은 내 글을 쓴다. 글 쓰는 법은 누구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고 믿기에, 여기에 있는 그대로 내 '모든 순간의 의미'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