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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공선사 Jun 21. 2024

나를 경영하는 금강경season5(14.비설소설분1)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떠나 법(法)을 따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수보리 여물위 여래 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須菩提 汝勿謂 如來 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이르지 마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


여래께서는 설한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래께서 법을 방대하게 설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 법문이 지금까지 잘 전해 내려 오고 우리는 그것으로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다.

이 정반대 되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대가 어떤 사람에 대해 그대는 이렇게 저렇고 설명해 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 어떤 설명이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모두 말로 옮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해 모두 옮길 수 없다.


왜냐하면 말과 마음 이전에 그 사람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으로 존재하든 부처로 존재하든 어쨌든 그 존재 자체는 모든 모습을 이미 구족하고 있다.


존재와 별개로 설한 법(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존재를 벗어나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여래는 설한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여래의 설한 법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이미 진리에 어긋난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로서의 내가 이미 있고, 또 공부하는 (여래가 설하는) 나 자신이 따로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둘로 쪼개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는 하나인데 나는 둘로 쪼개지니, 실상(實相)과 어긋난 모습을 하게 되고 당연히 고통이 따르면서 갈등과 투쟁이 내면을 지배하게 되므로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내가 불법(佛法)을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영원히 찾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여래가 있고 또 따로 설했다는 법이 있으니 우리는 여래(如來)를 부분적인 존재로밖에 수용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여래(如來)를 향해 부분적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된다.


여래라는 존재 그 자체를 통째로 수용해야지, 설법만 수용해 봐야 중생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통해 여래를 받아들여야지, 금강경이라는 설법만 받아들이면 그것은 금강경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금강경을 독송을 하면 금강경 뜻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안에 부처님은 없고, 나 자신도 없으며, 오로지 금강경 독송을 하는 나만 있게 되니 그 이전의 참나는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래가 설한 법(法)은 무엇인가?


그대는 이미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스스로 그것을 잘 확인해 나가라는 것이다.


내가 있고 또 법이 있어 그 법을 찾고 깨닫고 또 그래서 나를 찾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떠나 법(法)을 따로 찾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법을 찾는 또 하나의 자기를 만드는 일 밖에 안된다.


또 법(法)을 떠나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따로 찾는 것은 역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멋대로 생각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존재를 찾는 것은 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여래가 설한 법이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 되는가? 공부를 하기는 해야 될 것 같은데...


내가 공부한다, 수행한다, 믿는다, 나 자신을 찾는다 하는 등등의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그냥 즐겁게 믿고 공부하고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하고 수행하고 믿고 찾는 자기를 의식하면서 그렇게 하면 아상(我相)만 더욱 강해지고 여래로부터 더욱 멀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즐겁게 법문을 듣는 사람이 공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와서 법문을 듣는 사람보다 훨씬 이 길을 앞서간다.


공부하는 자기 자신을 나에게 내세우지 않으니 내가 주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공부하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면 작은 것은 받아들이지만 정작 자기를 넘어서는 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없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다.


내가 공부해서 변해간다는 생각을 자꾸 가지게 되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공부해서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무리한 힘이 들어가서 홈런이 아니라 파울이 나오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변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야지 더욱더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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