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은 두뇌와 영혼의식 자체가 없어진 존재이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라한이란 실로 아라한이라고 할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입니다.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남함은 어느 정도 상상하면 조금 비슷하게 이해될 수 있고 또 애쓰면 부분적으로 실천도 가능하지만, 아라한이란 존재나 상태에 대해서는 상상을 불허하고 비슷하게 흉내 내에도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실제로 자기가 아라한이 되지 않고서는 아라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생각도 오류가 된다.
앞의 세 성인은 과(果)라고 불렀고, 아라한에 와서야 이제 비로소 도(道)라는 명칭이 붙는다. 아라한이 되어야만 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다원부터 아나함까지는 아직 몸 푸는 정도로서 아라한에 응시할 기본 자격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하근기자는 수다원에 이르러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중근기자는 사다함에 이르러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상근기자는 아나함에 이르러 깨달았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선지식(善知識) 없이 자기 혼자 수행의 최종적인 한계이다.
그럼 아라한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억지로 조금 살펴본다.
두뇌의식과 마음의 체(體)인 영혼의식 전체가 통째로 없어져버렸다. 따라서 몸이 있지만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인간령(人間靈)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무심(無心)과 무아(無我) 또는 공(空)이라고 한다. 이른바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空)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일어날 바다 그 자체가 없다.
무애행(無碍行)이 비로소 성립된다. 왜냐하면 그 어떤 행을 해도 과보를 받게 되고 윤회하는 주체인 영체(靈體)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림 없는 행이 가능한 것이다. 앞의 세 성인은 행을 하면 아직 과보를 받으므로 과(果)라고 이름한다.
당연히 계(戒)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파계(破戒)라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때 자유자재한 상태가 된다. 이를 이름하여 자유혼(自由魂)이라고 한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있고 싶으면 있고.. 등등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이다. 법(法)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법력(法力)을 갖게 된다. 아나함까지는 개인의 영력(靈力) 일뿐이다.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게 되어 있다. 아예 번뇌망상 자체가 붙지가 않는다. 깊은 내면에서 아주 미묘한 의식 자체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모든 존재의 과거세와 현세, 그리고 미래세와 시방(十方)을 보게 된다. 드디어 우주적인 지혜(智慧)를 가지게 된다. 아나함까지는 아직 까막눈이다.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영혼세계를 모두 보게 되고 알게 된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사라졌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곳이 모두 극락이 되고 처소(處所)의 분별이 없게 된다.
반야바라밀에 속하게 되어 삼천대천세계를 오가며 대우주 부처님과 드디어 하나가 되어 교류한다. 자기 자신이 신이나 부처로 나설 수도 다른 신이나 부처님들에게 나서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비로소 모든 불자들이 원하는 천도(遷度)를 할 수 있게 된다. 영가천도는 실제 아라한이라야 가능하다. 왜냐하면 극락이든 어디든 부처님 세계로 데려다주려면 자기가 그곳에 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혼의 얽힌 인연과 한을 풀어주고 정화시켜 주고 참회하게 만들려면 그만한 큰 법력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냥 염불을 들려준다고 영가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상태의 절에 큰스님 수준 정도로는 천도재를 수백 번 지낸다고 천도되는 것이 아니다.
천도재는 그냥 형식이고 절차일 뿐이다. 그리고 죽은 영혼보다 산 사람을 위한 면이 더 많다.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아라한을 물들일 수 없고 더럽힐 수 없고 깨끗하게 할 수도 없다.
어떤 행을 하지 않더라도 존재 그 자체로 인간세상이 큰 덕(德)을 보게 된다. 자신의 광명으로 세상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불빛이 무슨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 밝음의 혜택을 모두 누리는 것과 같다.
아라한에게 공양을 하는 이는 모두 큰 복덕(福德)을 얻게 되고 선근을 심는 것이 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불문하고 모든 존재의 영혼을 다루고 교화하며 업장을 소멸시켜 줄 수 있다.
24시간 어느 장소에서건 어떤 상황에 처하건 항상 선정(禪定) 속에 있다. 이른바 6바라밀 가운데 선정바라밀이 완성된 것이다.
비로소 법문(法門)을 하고 중생구제를 할 자격과 능력을 갖추게 된다. 실상(實相)을 보고 알고 자비심과 방편을 원만하게 갖추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문을 해도 논리와 초논리로 자유자재로 오가지만 모든 법문을 하나로 꿰뚫는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법문도 저 세계와 이 세계를 오가며 자유자재하다.
신과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심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고마움을 자기가 아라한이 되어봐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뭐가 뭔지 모른다. 반면 사이비들은 신과 부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부처 또는 신 노릇을 한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야 화두(話頭)나 선문답(禪問答) 등이 통하게 된다.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 아나함이 되는 것까지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지만 아라한이 되는 것은 극난(極難)하다.
아라한이 되려면 자기 목숨 뚝 떼어놓고 자기 자신과 생사(生死)를 걸고 한판승을 벌여야 하고 더불어 우주의 마장(魔障)과도 싸워 이겨야 한다. 하물며 그 어떤 것도 바랄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아직 제8식인 미세망상이 남아있는 것이므로 아라한이 아니다. 당연히 아라한은 생각을 해서 말하거나 법문 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을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할 뿐이다.
아라한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말해도 되고 말 안 해도 된다. 왜냐하면 사실을 말하는 것이므로 거짓이 아닌 까닭이다. 또 말하든 말든 자기 자유이기 때문이다. 단, 일부러 자기를 깨달았다고 내세우거나 광고하지 않고 오히려 극히 평범하고 완전히 순수하게 지낸다.
아라한과 기인(奇人)은 극과 극이다. 기인은 그냥 상식에서 벗어난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중생일 뿐이다.
흔히 깨달은 사람은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엉터리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데, 아라한이 깨달았어도 깨달았다고 말을 하지 않는 실제 이유는 바로 상대방이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만 했지 실제 모르기 때문에 말을 해도 이해되지 않고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소용없는 이유 때문이다. 반면 깨달았다고 또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아라한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말 이전에 이미 알아보기 때문에 굳이 깨달았다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계는 사이비아라한, 사이비선지식, 사이비부처 천국이니 조심 또 조심하기 바란다.
차라리 도(道)는 좀 낮지만 순수한 인간미와 기본적인 인격을 갖춘 스님을 찾아가는 것이 안전하고 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