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 season2(19.장엄정토분4)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인 불심을 내게 되면 모두가 원만하게 풍족해진다.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 한 구절을 듣고 문득 마음이 열려 육조 혜능대사가 오조 홍인선사를 찾아갔다는 말도 있듯이 금강경의 대표적인 구절이고 모두가 즐겨 염송 한다.


머무는 바가 없다고 하지만 육조 혜능대사는 이 성(聲)에 잠시 마음이 머무르는 바람에 그만 해탈까지 한 것이다. 그나마 진리를 깨우쳐 주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르는 공덕은 무한히 크다. 모두 좋은 법문을 듣고 선지식을 보고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가?


머무는 바가 없다는 뜻은 그 대상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막고 입을 닫고 접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반면 대상으로부터 떠나라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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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마음이 머무른다는 것은 그 마음이 중생심으로 머무르는 것을 뜻한다.


그 대상의 실체와 행(行)과 그 의미를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음이 머무르면 소위 말하는 헛다리를 집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자칫 인연의 굴레에 걸려들 수 있고 아무래도 그 대상과의 교류에서 인과를 만들게 되기 쉽다.


그래서 결국 고(苦)를 초래하게 된다.


불심과 불심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심과 중생심이 만나면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그에 따른 의식을 낳고 그래서 그 대상에 마음이 매이게 된다.


내가 중생심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그 대상에 얽매여 질식사하게 된다. 다행히도 불심을 끄집어내어 만나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늘 자유를 가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 마음에 중생심을 가지고 대상을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생심은 머무는 순간 반드시 업(業)을 낳기 때문이다. 업은 자유를 구속한다.


반면 불심을 가지고 대하면 어떤 색성향미촉법에 대해서도 매이지 않게 되므로 머물든 머물지 않든 상관없다.


불심은 대상에 대해 '뗐다, 붙혔다' 마음대로 해도 티끌만 한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롭다. 중생심으로 '뗐다, 붙혔다' 할 때마다 흔적이 남아 나중에는 그 마음이 지저분한 누더기가 된다. 그래서 부자유를 가진다.


선지식은 기도해 주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24시간 늘 머물러 있지만 그것이 선지식을 조금도 오염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걸리지 않으니 진실로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머물러야 부처님들께서 가피해 주게 된다. 이 이치를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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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진실로 신도들에게 기도를 해주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도들의 마음이 자기를 오염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은 스님은 산속으로 탈출해 있지만 산에 머물면 산의 마음이 또 자기를 물들이니 장소와 대상을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겁이 많은 사람은 불자가 될 수 없다.


종교인들이 진실로 기도를 못해주는 이유는 그 자신이 실상(實相)이 아니라 신(神)에 대한 맹신(盲神) 즉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무작정 신에 술 취하듯 취하는 것으로 인하여 환상 내지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머무는 바 없는 마음, 즉 무주심(無住心)이 곧 불심(佛心)이니 불심을 가지고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로 행(行)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음을 낸다는 것 자체가 마음으로 행하는 심행(心行)이다.


불심에 밝은 광명과 바른 안목과 그에 따라 생기는 지혜를 바탕에 둔다.


이것이 되면 자유자재로 마음을 내어서 대상에게 그것이 전달되어 그 상대방이 불심에 감화되어 함께 반야바라밀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억지로 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 마음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무위행(無爲行)이다.


불심이 흘러나와 넘쳐서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는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채워지게 된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말이다. 넘치면 상대방을 더럽히게 되고 모자라면 상대방을 허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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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인 불심을 내게 되면 모두가 원만하게 풍족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생심을 많이 내어 자기 존재를 집착에 매이게 하기 이전에 자기 내면을 잘 펌프질 해서 저 깊은 심연에 고여있는 불심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만드는 것이 곧 자리(自利)라면 마음을 내는 것은 곧 이타(利他)가 된다.


이렇게 되면 불국토를 멋있게 장엄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이 체(體)이고 마음을 내는 것이 용(用)이기도 하다.


체(體)가 용(用)을 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방편상 상(相)이 필요하게 된다.


석가모니불은 본래 대우주신이지만 진리를 펼치기 위해서 싯다르타라는 상(相)을 만든 것이다. 싯다르타라는 몸이 없으면 누구도 이 대우주신을 볼 수 없고 그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때의 상(相)은 업(業)으로 만들어진 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일컬어 화신(化身)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화신으로서의 상에는 그래서 그 어떤 욕심이나 집착이나 어떤 의식도 붙지 않게 된다. 그래서 체(體)가 벗어버리면 그냥 전신사리(全身舍利)로 화해버린다.


지금도 문수보살님이나 보현보살님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을 비롯한 많은 부처님들께서 화신(化身)을 수시로 나타내며 우리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 우리도 그에 맞춰 하루속히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중생으로 화(化)해보자.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완벽하게 실천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어본다면 분명히 큰 이득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색(色)과 공(空)을 통틀어 진리에 따르게 함으로써 중생들에게 큰 이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이와 유사할까?


1. 나를 잊는다.


살면서 나 자신의 이익과 욕망, 그리고 두려움과 선입견, 집착과 지난날의 습관을 비롯한 기타 여러 감정 등에 스스로 걸려서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 나를 믿는다.


나를 잊는다고 나 자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 자신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의 믿음은 특정한 어떤 하려는 일과 관련하여 일을 성공한다는 믿음 차원이 아니라 나 자신이 존재하고 생명을 영위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전체적인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3. 해야 할 일을 한다.


나를 잊고 나를 믿으면 그다음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하지 않고 뒤로 미루며 내가 할만한 일만 골라서 하곤 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어디 나의 이익만 생각하여할 일만 하고 잘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해 보기 위해서는 자기가 할 수 있고 할 만한 일만 골라해서는 안되고 자기 인생 전반에 걸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시도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당위(當爲)를 통해서 높아지지, 현상의 만족을 통해서는 기분 좋을지는 몰라도 행복할 수는 없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게 되면 모든 것은 당위로 향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고 할 때 그 마음의 대상은 바로 자기 존재 전체를 염두에 두는 '당위'인 것이다.


4. 존재와의 균형


나를 잊고 나를 믿으면서 무심(無心)으로 마땅히 내 인생에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힘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막대한 노력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여기서 자기 존재와 하는 일이 균형을 갖지 못하면 모든 것이 유위(有爲)로 떨어져 버린다.


일에만 치중한다거나 자기 자신만 자꾸 되돌아본다거나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되어 무리하게 되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을 내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기 존재의 상태를 만들어내 가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가야 한다.


5. 결과를 나누고 나를 뒤로 물린다.


그렇게 해서 한 일이 가져오는 결과물은 이미 내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두루 나누고 그 결과물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떼어 놓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결과물에 내 마음이 머물게 되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쓰는 공덕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해나간다면 여러분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어느 정도 실천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행(行)이 과보로서의 업(業)을 낳지 않고 세상에 득(得)을 주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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