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하나조차도 우주를 담고 있고, 우주 역시 무한한 티끌을 담고 있다.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처럼 많은 항하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여러 항하만이라도 오히려 무수히 많거늘 하물며 그 모래수이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피부에 와닿을까?
석가모니불께서 이 항하에서 여러 차례 설법하셨는데, 그 자리에 있는 항사의 모래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불교에서는 길다, 짧다, 많다, 적다, 크다, 작다 등을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비유하여 표현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 생각으로 하게 되는 상대적인 의식을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티끌 하나조차도 우주를 담고 있고 이 우주 역시 무한한 티끌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작용 역시 미시(微視)를 뛰어넘은 작은 것이고 거시(巨視)를 뛰어넘어 큰 것이기 때문이다.
항하(恒河)는 거시의 세계, 모래는 미시의 세계, 항하에 있는 모래수는 거시 속의 미시, 모래처럼 많은 항하는 미시 속의 거시를 상징 한다.
이것은 무상심심미묘법(無上深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로 대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묘한 것이 더 이상 깊고 깊이 미묘할 수 없고, 크나큰 것이 더 이상 클 수 없는 것이다.
불법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렵고 크나큰 인연이 있어야만 불법(佛法)을 만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광대무변한 불법을 만난 사람이 바로 아라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