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 season4(13.구경무아분1)

처음 질문이 다시 나온 것은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이시 수보리 백불언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니 어떻게 마땅히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리까.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설법을 청할 때 제일 먼저 올렸던 질문이다. 지금까지 석가모니불께서 이 질문에 대한 설법을 쭉 하셨는데, 여기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아뢴다. 그런데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질문에 또 자상하게 법문을 해주신다.


수보리존자가 똑같은 첫 질문을 드렸던 것을 잊어버린 것인가?


그게 아니다. 여기에서 금강경의 구성조차 진리에 들어 맞추는 것이다.


시작과 그 흐름과 그 끝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또 시작이라는 순환론적 시간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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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또한 속(俗)에서 성(聖)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聖)에서 속(俗)으로 다시 이어져 마침내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성(聖)스러운 것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성(聖)스러운 것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이를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불교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원(圓)을 삼는데, 원은 어디에 한 점(點)을 찍든 다른 모든 점과 이어져 있고 또 점과 점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어 서로 평등하다.


기독교의 창조에서 종말로 끝나는 직선적 시간관은 물질의 변화에 따라 인식되는 시간관으로서 상(相)이 있으므로 사바세계에 한정되어 성립되는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주장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타락, 그리고 하나님에로의 귀의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왕국으로 귀의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작으로 돌아가는 원(圓)이고 순환이다. 그런데 종말을 주장하면 직선이라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을 버리거나 하나님의 왕국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되는 내부모순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모순을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이 곧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 가운데 시계추처럼 어느 한쪽을 왔다 갔다 하는 양극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세상에 궁극적인 구원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어렵다. 갈등과 투쟁의 역사는 이런 내부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내부모순을 가지고 있으면 내부의 투쟁에 의해서 결국 스스로 사라지게 된다.


먼지가 모여 별이 되고 그 별이 다시 결국 먼지로 돌아가고 그 별을 이루었던 먼지가 다시 별이 되는 우주를 어린 학생들도 알고 있는 시절에 종말을 주장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相)의 변화일 뿐이지 본성(本性)의 변화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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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과 원은 한 점에서 서로 만난다. 그 점은 바로 불성(佛性)이고 신(神)이다. 기독교는 하루빨리 원(圓)으로 귀환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인간 의식은 점점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수보리존자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성인(聖人)이다. 부처님 설법의 형식 자체를 통해 중생들에게 스스로 순환을 가르쳐준다.


왜 순환이 중요한가?


다시 재생(再生)할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고 과거의 자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직선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진실이 아닌 것이다. 지옥에 가면 그것으로 그 존재는 끝이고 구원이 없다. 그런데 불교는 지옥에서조차도 구원된다.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처음 던진 이 의문을 통해 지금까지 쭉 부처님 설법이 이어져왔고, 설법으로 그 의문의 답변이 완성되자, 다시 그 의문을 던짐으로써 의문과 설법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이 의문은 처음에는 단순한 의문이었지만 이제는 그 의문 속에 진리를 담고 있는 의문이 된 것이다. 의문과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이 원(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흔히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우리가 얘기하지 않는가?


아시겠는가? 불교는 세속을 떠나는 종교라고 알고 있다면 완전한 오해이다. 세속을 통째로 집어 올려 성(聖, 반야바라밀)과 하나로 만들어 반야바라밀과 세속이 원(圓)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중생은 시작이고 부처는 끝이 아닌가?


그래서 부처를 나를 떠나 따로 찾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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