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너밖에 지킬 수 없는 이유

청춘 10

by 박범진 작가

그 녀석은 해외연수 프로그램에서 내가 관리했던 학생이다. 그 녀석은 겉으로 밝고 씩씩해 보였지만 얼굴에는 항상 설명하기 힘든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되었을 때 대부분 학생은 쇼핑도 하고 비싼 음식도 사 먹으며 이십 대의 행복을 만끽하였다. 그러나 모든 학생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녀석이 그랬다. 그 녀석은 자유시간에 숙소에 머물면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매 끼니는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이나 편의점 주먹밥으로 때웠다.

어느 날 나는 사 온 음식을 그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별것 아닌 나의 호의를 무척 고마워하면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다음 날 그는 자기가 저녁을 책임지겠다며 내게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그곳은 관광지이지만 소고기는 한국보다 저렴하였다. 그는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나에게 말했다.

“교수님! 저 기초생활수급자예요.”

모든 학생이 행복해 보였지만 그 녀석만은 예외였다. 나는 왜 그 녀석이 기초생활수급자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 녀석에게 딱히 해 줄 말이 없어서 애써 그의 상황을 무심이 듣고 넘겼다. 다만 그런 사람들의 상황을 짐작하며 그 녀석을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너무 밝은 세상만 떠들고 다녀서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여하간 모든 일정을 끝내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그 녀석의 기억을 잊고 살았다.

3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녀석이 상담하러 왔다. 그 녀석은 연구실에 들어오더니 턱 하니 의자에 앉았다. 성숙한 것인지 아니면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인지 알게 모르게 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녀석은 이제 4학년 졸업반이 되었고 공인회계사 준비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시험을 준비하려고 하니 너무 막막하여 나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았다.


사실 그 녀석의 부모님은 그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몇 해 전부터 조현병이 생겨 자기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형제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동생이 하나 있는데 집안이 엉망이 되자 집을 나갔다고 했다. 지금은 동생과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그 녀석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휴학을 했다. 다행히 올해 삼촌이 일 년 동안 엄마를 돌볼 테니 얼른 대학교를 졸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겪어보지 못한 인생의 쓰디쓴 고통이 그의 이십 대 청춘을 멍들게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소득이 생겨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하였다. 그래서 어머니 병원비조차 내기 힘들다고 하였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한참 망설였다. 나는 그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하였다. 올해 졸업이니 시험 준비보다 어떻게든 취업하여 집안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의 마음이 다소 차분해진 것 같았다. 나에게 큰 기대를 하고 찾아왔을 텐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했다.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그에게 내가 조언해 줄 입장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부모님 인생을 네가 책임지려 하지 마라! 네 인생은 오직 너만이 책임질 수 있으니 좌절도 절망도 사치일 뿐이다. 네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네가 원해서 너의 부모님을 만난 것도 아니니 너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냥 지금부터 너의 인생을 네가 지키며 살면 된다. 그러나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너만 생각하며 살아라.”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작은 배려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다.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살아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지나간 아픈 기억을 억지로 견디며 사는 것도 슬프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더 슬프다. 그 녀석이 정해진 운명에 발목 잡혀 남은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자기밖에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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