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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Apr 10. 2024

봄산 넘봄

- 어느 하루 

ⓒ 스침

- 산을 타지 않는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을 만나 "두려워서 못 간다" 했더니, "전 두려워서 갑니다" 했다. 연전에 여수에 들렀다가 영취산 진달래가 장관이라길래 가볍게 여기고 올랐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입에선 단내가 진동하고 발목까지 접질려 만신창이가 됐었다. 그래도 노을 진 바다처럼 펼쳐진 진달래 군락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 진달래는 척박한 땅을 딛고 피는 속성이 있단다. 어릴 적 불난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졌던 덴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현관문을 나서 멀지 않은 곳에 얕은 구릉이 있다. 백련산(93m)이라 불리지만 일반적으로 산은 높이 100m 이상을 가리키기에 미안하지만 산축에 들지 못한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산을 타지 않은 것이다. 


- 동네 마실 삼아 오를 수 있는 이 구릉은 봄이 제격이다. 초입부터 벚꽃이 아우성치며 하늘을 가려 그늘을 낸다. 섬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꽃비가 내려 선계가 따로 없다. 하지만 앵두만은 못하다. 예전 살던 낡은 집, 밥주걱보다 조금 큰 마당에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바람에 앵두꽃 떨어지던 봄밤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 스침

- 사진을 포착의 예술로 승화시킨 포토그래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를 '마음의 눈'에 양보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촬영이란 행위에 대한 이만한 시적 비유가 또 있을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눈을 감지 않으려 한다. 명상과 기도의 시간이 아니라면 그럴 기회가 없다. 그러니 사진을 찍는 행위는 반명상쯤 되지 않을까. 빛을 통해 피사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음의 눈을 떠 프레임을 정하고 초점을 맞춰 셔터를 누른다. 영화감독이 배우의 입을 빌어 자신의 서사를 풀어내듯, 사진가는 한 장의 컷에 담은 피사체가 관객에게 발언하게 만든다.    

ⓒ 스침


ⓒ 스침

- 그림자는 왜곡의 전형이다. 투영면과 시간, 발광체의 위치에 따라 수없이 변신한다. 꽃이 하도 흔하니 자꾸 그림자에 시선이 간다. 한눈 팔린 나는 대지의 힘줄처럼 올라온 나무뿌리에 걸려 또 발목을 삐끗했다. 젠장, 구릉도 벅찬 몸이다. 감히 봄산을 넘보다 야단 맞은 게다.  

ⓒ 스침

- "안 맞아. 궁합이 안 맞아. 그저 바라보며 막걸리나 먹을 일이지. 오르긴 뭘 올라."


투덜대며 내려서는 길, 멀리 강화 마니산이다. 단군 왕검이 하늘을 열었다는 신화의 장소가 지척이다. 불현듯 '신화와 글쓰기'를 주제로 책을 모았던 기억이 났다. 읽을 책은 쌓이기만 한다.      


ⓒ 스침





- 바다에 뜬 섬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상상을 한다. 어쩌면 조물주는 먹을 찍어 붓으로 세상을 만든지 모른다고 말이다. 저 섬들은 붓에서 떨어진 먹물이 아닐까 싶은 게다. 


- 어떤 녀석들의 집인지 모르겠지만 집터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잘 잡았다. 이 봄, 꽃향기 진동하는 둥지에서 아들딸 여럿 낳고 배 곯지 말라는 기원을 담아 마음의 눈에 담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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